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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Jul 19. 2023

비상대피 준비 중입니다

앙(仰) 이목구심서Ⅱ-7

안전 안내 문자
[경상남도] 도내 산사태 특보 발효 중, 산사태 관련 신고 급증 중, 산림지역(급경사, 비탈면) 접근금지, 위험지역 사전대피 등 안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퇴근 후 산청읍에 가서 장을 보고 오는데 옆집에서 상기된 얼굴로 얘기한다.

"새벽에 400mm 정도의 비가 쏟아질 예정이라 산사태에 대비해서 대피를 하라고 합니다. 대피장소는 요양원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도 비는 내리고 있지만 순한 고양이처럼 조용히 올뿐이다. 이런 비가 흉악한 괴물로 변해 우리를 해칠지도 모른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비의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종일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에 희생당한 사람이 무려 50여 명이라는 발표는 모두를 공포와 안타까움에 빠뜨렸다.


  음전하기만 하던 경호강은 빗물에 으르렁거린다. 아직은 적의를 보이지 않고 있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병풍처럼 비스듬히 서있는 뒷산도 아직은 태연하다. 우리는 여느 날처럼 방에 앉아있지만 마음은 불안으로  요동친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마당에 나가 주위를 둘러본다. 옆집은 차를 가지고 이미 대피했는지 집안엔 암흑만이 들어차 있다. 위층에도 어두컴컴하다. 우리도 피해야 하나. 좀 더 지켜보자.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때 피하자 생각한다. 아내는 서둘러 필요한 짐을 싸느라 바쁘다. 뜬 눈으로 새벽을 지키다 보니 03시가 넘었다. 비는 여전히 대지를 두드리고 있다. 그나마 다행히 세우(細雨)다.


  설핏 잠이 들었다. 눈 떠보니 아침 8시가 지났다. 잠깐 누웠는데 아예 곯아떨어진 것이다. 비는 게릴라성으로 내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마당의 감나무와 참나리 꽃이 빗속에도 웃고 있다. 세상은 그대로다. 바지를 무릎께로 접어 올리고 슬리퍼를 신은 채 우산에 의지하여 강변으로 나가본다. 물가에 무성하던 수초들이 대부분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강의 팔부능선을 점령한 거대한 물줄기는 바닥을 기어가며 일렁이는 구렁이의 등처럼 꿈틀거린다. 징그럽고 오싹한 한기가 엄습한다. 도로 위로 도망치듯 올라선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다. 사람은 인도로, 자동차는 로, 물은 물길로 다녀야 한다. 때로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자연의 본성인가 보다. 사람이 길 없는 숲에 들고, 고라니들이 도로를 가로지르며, 물이 물길이 아닌 마을로 도시로 뛰어든다. 대놓고 거리를 활보한다. 자연의 법과 우주적인 원칙이 정도라면 지금의 빗물은 탈선하고 있다. 일상에서 멀어져 흑화 중이다. 저 파충류 같은 빗물은 독 묻은 이빨로 산과 마을과 도시를 물어뜯는다. 힘없고 약한 데가 어이없이 무너지고 쓰러지고 죽어간다. 왜냐고 탄식하면서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책임이다. 지혜로운 자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존재다. 자연을 파괴하며 자해를 일삼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자연은 인간에게 실망하고 있다. 배신감에 차있다. 이제라도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조금 불편하고 느리더라도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틀림없이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혜는 이런 곳에 필요하다.


  비가 멈추었다. 아직도 어두운 얼굴의 하늘을 본다. 기상캐스터는 내일이면 장마가 잠시 물러나고 폭염이 있을 거라고 한다. 무더위라는 단어가 먼 과거의 일처럼 들려온다. 더위가 간절하게 그리워진다. 오늘은 제발 온 국민이 무사하기를, 산 중턱의 소들도 편안한 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두 손 모은다. 아내는 간간 빠진 옷가지를 캐리어에 챙겨 넣는다.

도로를 걷고있는 빗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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