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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Nov 30. 2023

11월 30일에게

앙(仰) 이목구심서Ⅱ-22

11월 30일에게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그 사이에서 분투하기엔 나의 하루는 너무나 짧다. 일주일이 그렇고 한 달이 그렇다. 11월의 끝이다. 어느새 2023년도가 한 달 남았다. 왜 이다지도 시간이 빠른 것인지 모르겠다. 나이 만큼의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면서 당연한 것처럼 그동안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무엇으로 삶을 채워왔는지, 어떤 생각들이 머뭇거리는 발을 데리고 다녔는지, 그 많은 눈짓과 손짓은 다 어찌 됐는지 가늠해보지만 도통 모를 일이다. 근래 들어서 충실하다고는 못하겠지만, 퇴근 후나 휴일에는 책을 보며 지냈다. 분명히 만족스럽지 못한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최소한 열심히 살고 싶다는 그런 마음만은 간직하며 살아왔다. 나름대로 바쁘게 어느 정도 짜인 일정으로 하루를 채워나갔다. 그래서인지 늘 시간이 부족하였다. 나는 더 깨어있고자 했으나 밤은 야속하게 쉬이 무너져 내렸으며, 남아있는 책의 페이지는 더디게 넘어갔다. 26시간을 쓰고자 했으나 이런 모험은 다음 날의 시간을 차입해서 쓰는 하루짜리 사채처럼 그날 갚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불한 시간은 육체를 저당 잡고 물고 늘어져 기필코 침대에 쓰러뜨렸다.  그런 날이면 하루가 더 짧아져 버렸다. 이처럼 나의 하루는 항상 부족하다. 충분하지 않고 늘 아쉬운 시간이어서 나의 그것은 더 빠르게 흘러간다. 내가 갈구하는 만큼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아지고, 집중의 농도만큼 길이는 줄어든다. 시간은 다가갈수록 더 멀어져만 가는 돌아선 연인처럼 행동한다. 이러다 삶이 나를 외면하고 휙 지나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인생은 짧다고 나보다 한 발짝 앞선 선배들처럼 탄식을 쏟아낸다.


  이렇게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가 버린 시간은 지금 어느 바다 밑에 조개처럼 모여 있을까. 해변에 고인 무수히 많은 사구(沙丘), 그 모래알 하나하나는 우리가 흘려 보낸 시간의 낱알들이 아닌가. 수만 권의 책을 쌓아 놓은 변산반도의 채석강처럼, 바닷가 어느 곳에 켜켜이 쌓여 바위처럼 굳어가고 있을까. 깊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 시간의 몸은 망각에 갇혀 어두워지고 있는가.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시간은 영영 햇빛을 볼 수 없어 잊히는 것인가. 도서관의 책처럼 꺼내어 지난 날을 재생할 수는 없는 건가. 아무렇게나 흘러 내려간 지난날의 노도(怒濤)를 불러들여, 이번엔 정식으로 밝고 깨끗하고 곧은 길로 흐르도록 시간의 물꼬를 되돌릴 수는 없는가.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안다. 시간은 무자비하다. 개개인의 사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역사이래 모든 생명으로부터 끝없는 불만과 원망과 미움의 눈초리를 으면서도 항변의 말 한마디 없이 자기 임무를 완수할 뿐이다. 차가운 성실함이 그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시간을 탓하지 말아야겠다. 상대가 벽이라면 내가 자세를 바꿔야 한다. 시간을 정복할 수는 없으므로 잘 타협하여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자. 그러나 주도권은 언제나 내게 있어야 한다. 시간에 끌려다니는 삶은 하인처럼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가까스로 살아지는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시간을 통제하며 사는 삶을 만들어가야겠다. 시간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인가, 너라는 타인인가, 아니면 시간 자신인가. 이 물음에 항상 답하며 살아가고 싶다.


  사실 시간은 자기조차도 어쩌지 못하고 낡아가고 있다. 겁겁의 세월 동안 나이 들어가고 늙는 중이다. 결국 어느 날엔가 시간조차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우주 전체가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운명조차 어쩌지 못하지만, 찰나에 불과한 우리의 삶에 비하면 시간은 영원에 가깝다. 우리가 시간에만 온전히 기댈 수 없겠지만 때때로 그에게 삶을 기대보고 싶어 한다. 꽉 막힌 어둠도 언젠가 그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제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어서 귀가 따가울 지경이지만 그래도 다시 되새길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재에 집중하자. 지금 느끼고 말하고 아파하자, 눈앞의 시간이 풀어놓는 삶의 난제들을 얼마간 그에게 맡기고 담담히 지켜보자. 그가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시간의 배 위에 올라탄 우리는 저마다 도착해야 할 항구가 다르다. 또 우리는 목적지인 항구가 어디일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인생의 길고 짧음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통제할 수 없는 것보다는 이제 가능한 것들에 주목한다. 지금 눈앞에 놓인 기회를 선택하는 것은 내 몫이다. 한 움큼 쥘 수도 있고 놓아버릴 수도 있다. 의지에 따라 상황이 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은 일상으로 점철된 하루이기에 충분히 개입할 수 있다. 문단속하듯 하루하루를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다. 이왕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버리니 이 부족한 시간이나마 내 소유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우리 인생에서 연금술사가 될 것이다. 평범한 바윗덩이에 불과한 존재가 시간의 손길 아래 마침내 '다비드'가 되고 석굴암의 '본존불상'이 되었다. 조급해할 것 없이 묵묵히 나아가자. 드러나지 않고 무시를 당한대도 내 길을 가자. 지난한 시간과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줄다리기에서 승리하는 날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래서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이 되도록 하자. 그래, 그런 가운데 맛보는 짜릿한 희열을 에너지 삼아 내일로 걸어나가자. 밤이 짧다. 11월 30일이여, 이젠 영원히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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