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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Nov 09. 2023

좋다, 나의 느림이

앙(仰) 이목구심서Ⅱ-21

 좋다, 나의 느림이


  다가와 미끄럼을 타며 뒹구는 햇살에 온몸이 간질거린다. 가을날 오후 네 시다. 바람이 드러누운 도로 위를 돋보기안경을 쓴 할머니가 성경 구절을 외듯, 느실느실 읽어가고 있다. 이 한가로움에 차를 버리고 뛰쳐나가 산마루 억새 무리와 함께 바람에 나풀나풀거렸으면 한다거나, 코스모스 도열한 흙먼지 날리는 고향 역에 서서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부수고 일종의 혁명이라도 도모하고픈 계절이다.


  앞쪽에 탑트럭 한 대가 저속으로 가고 있다. 뒤따르던 차들이 연이어 브레이크를 밟더니, 곧바로 추월하여 도로 끝에서 소실점이 되어 아득해진다. 그러나 내 차를 앞서 달리는 흰 승용차는 가만히 트럭 뒤를 따른다. 그러다 멈칫, 한순간 추월을 하려다 만다. 나 또한 그 차량을 따라가고 있으므로 차량 통행이 별로 없는 도로에서 추월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선두의 트럭은 높은 저장용 탑에 막 추수를 끝내고 고봉으로 담아 올린 '나락'(볍씨)을 싣고 전전긍긍하며 도로를 오르고 있다. 이 나락은 어느 농부의 마당에서 볕이 내미는 손길에 몸을 뒤집어가며 잘 말라갈 것이다. 그리고 수분 함량이 15% 이하로 마른 나락은 정미소에 보내져 도정을 하면, 윤기가 잘잘 흐르는 햅쌀이 된다. 이 햅쌀로 갓 지은 밥은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다. 쌀 자체만으로도 달큰하다. 여기에 김치가 얹힌다면 금상첨화다. 특히 지리산 청정지역인 산청의 쌀은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 큰 일교차로 키워졌다. 이에 나라님의 수라상에 오르는 진상미로 그 지위나 평판마저 높은 쌀이 되었다. 이런 신분의 쌀이 트럭을 타고 나서는 첫 행차이다. 틀림없이 트럭은 소리쳐 외쳐댔을 것이다.

"비키시오. 비키시오. 임금님의 수라상에 오를 '나락'이 가고 있소. 모두 비켜나시오."

또는

"나라를 먹여 살리는 왕이 나가신다. 앞길을 열고 뒤를 따라라."

이 외침을 앞선 흰 승용차는 똑똑히, 거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트럭 앞에, 임금과 동급인 나락 앞에 감히 나서지 못했으리라. 밥보다 중요하고 높은 게 없으니 뒤따르기로 한 것이다.

 

  사실 나는 한 그릇의 밥을 위해 매일 출근하는 게 아니던가. 학교 가기 싫은 막내처럼 억지로 일어나 회사에 가고, 남남인 사람끼리 얼굴을 맞대며 그 많은 시간을 감내하는 이유가 나와 식솔들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아닌가. 저녁 식탁에 가족들 둘러앉아 한 그릇의 밥과 국을 놓고 행복해하지 않는가. 비록 요즘은 과거에 비해 쌀 소비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쌀은 온 국민의 주식이다. 멀고 먼 조상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수천 년 동안 매일매일 먹어 왔지만, 결코 내쳐지거나 물리지 않았다.

  

  밥은 위장에서 소화되어 몸을 유지하는 필수 영양분이 된다. 곧, 쌀은 살이 되는 것이어서 나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쌀알은 하나의 세포처럼 몸에 들어와 박힌다. 그들의 얽힘과 연대의 힘으로 몸을 경영하는 것이다. 내 몸의 영토엔 상당 부분 쌀에게 지분이 있다. 내 상상과 기억의 마당엔 쌀의 족적이 무수히 찍혀있다. 그러므로 몸만큼, 나를 세우는 쌀 또한 귀한 존재이다. 대접받는 대로 상대도 내게 대접해 준다. 음식을 귀하게 여기고 소중한 존재로 대우한다면, 그들 또한 몸에 들어와 최선을 다해 나를 이롭게 할 것이다. 지금도 한 톨의 쌀은 손과 발과 눈, 심장 안에서 피를 따스하게 데우려고 제 몸을 촛불처럼 태우며 사위어가고 있다.


  나락을 실은 트럭 뒤를 느릿느릿 따라가고 있다. 빠름이 미덕이 되어버린 도로 위에서 느림은 비난과 무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우리 주변의 느린 것들을 생각한다. 무엇이 있을까?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빠른 것들이 재빨리 머릿속에 뛰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비행기, 인터넷, 배달, 시간, 성과, 119 ---. 실낚시에 줄줄이 매달려 나오는 도다리들처럼, 기억의 무대에 연이어 빠름이 등장한다. 그만큼 작금의 세상은 속도를 중요시하고, 무한경쟁 속에서 빠름이 생명처럼 보인다. 우리 몸과 의식의 열차는 이미 빠름이라는 수렁에 빠져 균형을 잃고 기울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오늘 느림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 그 느림을 따라가고 있다. 빠름이 외형의 변화를 요구한다면, 느림은 질적인 성장에 필수적이다. 양과 결과를 추구하는 외적인 세상은 거의 포화상태라 할만하다. 이제 내면의 성장이 꼭 필요한 시대로서 느림은 특별한 선물이 된다. 팬데믹이 지구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느림을 가볍게 여기고, 소외시켜 왔기 때문이다. 기계적인 효율과 속도만을 강조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빠지면 흉물스러워 내버려지는 애드벌룬처럼, 속도는 사람을 허무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겉모습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옥수수처럼 꽉 들어찬 내면이 진짜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느린 이여, 고개를 들어라. 당당하게 늦잠을 자자. 어슬렁거리며 느릿느릿 걸어보자. 한 알의 볍씨가 들판 위 ‘황금’이 되어가는 그 속도만큼, 그만큼의 보폭으로 삶의 광장을 향해 걸어가자. 곧 어둠이 찾아올 거고, 승리의 환호성처럼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한 공기의 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느림은 미다스의 손을 가지고 있다. 느림의 품에서 부화한 예술가의 그림과 도자기와 詩는 오래도록 살아 숨 쉬지 않는가.


  어느새 샛길로 빠져들어 어두워가는 트럭 위 ‘나락’에 감사의 안부를 보낸다. 세상은 그로 인해 내일을 꿈꾼다. 그가 머무는 모든 마음자리에서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삶에 좋은 것들은 대부분 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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