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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Feb 29. 2024

하루의 무게

앙(仰) 이목구심서Ⅱ-28


출근길입니다.

검은 뻘밭에 빠진 병사처럼 질척거리는 어둠에 걸음은 더디기만 합니다.

저 멀리 불 켜진 일터가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하루가 시작합니다.

집을 나서서 공적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내게 찾아올까요.

저 지붕 아래에서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누구를 만날까요.

아직 경험하지 못한 하루이기에 약간의 두려움과 부담감이 발걸음을 훼방하곤 합니다.

길 양쪽으로 살구나무와 배롱나무가 실루엣으로 서 있습니다.

이들도 나처럼 하루를 시작하고 있군요.


모두가 새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제각각이지만 나의 하루와 그들의 하루가 다를까 생각합니다.

누구나 24시간, 똑같은 하루입니다.

그러나 하루의 무게는 각기 다르게 보입니다.

오늘밤 잠자리에 누워 하룻 동안의 활동과 내용을 측정한다면 몇 그램이나 될까요.

이십여 분의 어르신을 모시는 나의 하루와 기업 오너의 하루는 다른 것일까요.

아름드리 참나무와 엄지 손가락만큼 새싹을 밀어 올린 수선화의 하루는 다른가요.

늘 침대에 누워 시간을 헤아리는 게 전부인 고령의 어르신과 고3 발달장애아의 하루는 다른가요.


각자에게 하루는 고유한 영토와 같습니다.

나의 하루가 있다면 참나무만의 하루가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개별적이어서 다릅니다.

똑같이 시작하는 하루라도 자신만의 생각과 감성으로 맞이합니다.

그래서 이 하루는 온전히 나의 것이요, 그의 것입니다.

누구에게 양도할 수도 없습니다.

좋든 싫든 나의 소유입니다.

이 하루를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대체 불가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하루를 저울질하여 경중을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너의 하루는 가볍다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루의 무게는 누구나 같습니다.

참새의 하루와 나의 하루는 다르지 않습니다.

굳이 무게를 따지자면 모두 무겁다는 게 맞을 것입니다.

하루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게 옵니다.

그러나 개별적이라는 점에서 하루의 무게는 똑같이 무겁습니다.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 하기에 무겁습니다.

마치 십자가처럼요.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지만 자기의 십자가가 가장 무겁다고 생각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나의 하루가 가장 무겁다고 말하지만 이는 자기 등에 올려진 십자가입니다.

물론 무겁습니다.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게의 내용입니다.

어떤 내용물로 채워졌느냐가 관건입니다.

오물이나 죄로 채워진 그릇과 선행과 따뜻함으로 채워진 그릇은 같은 무게라도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하루를 무엇으로 채울지는 매 순간 나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출근 인식기에 지문을 찍으며 입술을 깨뭅니다.

무겁더라도 향기로운 하루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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