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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Mar 20. 2023

앙(仰) 이목구심서 8

봄 숲은  간지럽다

  봄 숲은 비릿하다. 태양은 숲에 다정한 미소를 보내고, 마음 데워진 나뭇가지는 잔잔한 바람에도 과하게 몸을 흔든다. 3월 봄 숲에 들어서면 비릿한 흙냄새가 올라오고, 풍선처럼 꾹꾹 눌러놓은 초목의 생명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으로 빽빽하다. 그 사이를 가르며 헤엄치는 바람을 따라  숲의 비릿한 내음은 산을 휘감고 있다.


  봄 숲에 들어서면 들린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황어의 율동처럼 뿌리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중력을 이겨내는 뜨거운 물소리로 들린다. 땅 아래 어둠 속 뿌리의 세계에서 지상의 멀고 먼 가지 끝 말초신경까지 끌어올리는 무진장한 강물의 상승. 그 굉음이 들린다. 봄 숲은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수력 발전소이다. 

  봄 숲은 간지럽다. 울타리에 갇힌 표피 속에서 꽃은 어서 나가고 싶다 조르고, 가지 끝에 고인 연둣빛 잎사귀는 오므린 허리를 펴고 싶어 허공을 두드린다. 햇볕의 가느다란 손길은 어서 나오라 손짓하고, 바람은 살랑살랑 옆구리를 비비면 본능처럼 커지는 가려움과 인내 사이에서 숲은 갈등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숲의 이곳저곳에서 발화하는 웃음소리가 보인다. 웃음은 제각기 다른 얼굴과 향기를 가지고 멀리 퍼져 나간다.

나무들 중에서 가려움에 가장 민감한 이는 매화이다. 그는 햇볕에 닿자마자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색 손으로 입을 가리기도 전에 웃어버린다. 그만큼 낙천적이면서 조급한 성격이지만 우리는 이 약점 덕에 기쁨을 일찍 맛볼 수 있다. 반면에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밤나무는 가려움을 참는 것에 있어서는 달인이다. 다른 나무들이 봄 볕에 경쟁하듯 꽃 피우고 잎을 내민 후에야 그는 기지개를 켠다. 봄의 끝자락이며 여름이 시작하는 6월에서야 때가 되었다는 듯이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러나 오래 참아 온 만큼 그 웃음의 농도는 강렬하여 온 산과 온 마을을 진동케 한다. 이 역시 유익한 느림이다.


  봄 숲의 은밀한 곳, 심연으로 들어가다 보면 솜털 같은 햇볕의 손길에 산 전체가 몸을 뒤틀어가며 웃음을 참아 내고 있다. 아이의 유치(乳齒)처럼 잇몸이 간질거리는 생강나무, 혈관을 따라 꿈틀대는 수액에 몸을 꼬는 서어나무의 검은 근육,  땅속 고사리들은 알속에서 껍질을 깨는 병아리처럼 지상의 문을 쉴 새 없이 두드린다. 가시 돋친 찔레나무도 가렵다고 몸을 흔든다. 오랫동안 햇볕 내려앉아 물렁해진 땅을 파 들어간 두더지도 온몸이 근질거렸다. 화산처럼 터지려는 웃음 참느라 붉게 달아오른 몸으로 언덕에 선 진달래도, 두꺼운 갑옷 사이로 꼬물꼬물 새어 나오는 손가락에 가려움 참아내느라 이 악다문 참나무도 있다.

  봄 숲 양지에는 가려움 참지 못하고 이미 웃음보 터뜨리고만 봄까치꽃과 달려드는 소양증에 불쑥 손가락 내밀어 긁어보는 애쑥들도 있다. 이처럼 봄 숲엔 겨우내 참아오던 속웃음을 시작으로 계주에서 바통을 넘겨주듯 크고 작은 웃음들이 계절 내내 이어진다.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 줄 아는 사람이 매력적이다. 사시사철 실없이 웃는 온실의 화초보다 때가 되어서야 피어나고 질 줄 아는 야생의 그것이 아름답다. 이런 꽃의 향기가 우리 마음의 속살을 간질이는 것이다.


  어두워지는 봄 산을 내려놓으며 입던 바람막이를 벗는 데 숫고양이 '우쭈쭈'가 옆구리를 긁으며 날 바라본다.


"봄이 부르면 숲은 가렵다지

 봄 숲은 가려워 웃는 거야


 당신이 부르면 나도 가려워

 마냥 긁고 싶어 져


 당신은 봄이야

 어디든 긁고 마는 봄이야


 올봄에는 내 몸도 가려웠으면 해

 피가 묻어나도록 박박 긁어봤으면 좋겠어


 당신이 부르면 나는 숲이야

 온몸이 가려운 봄 숲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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