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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Mar 27. 2023

앙(仰) 이목구심서 11

바위꽃이 피었습니다


바위는 살아있다. 

강가나 들, 또는 산에서 그들은 한 곳에 뿌리를 박고 평생을 살아간다. 바위의 심장은 쿵쾅거리고 바닥에 드리운 허파는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고 있다. 바위의 몸에 바짝 귀를 대고 들어본 사람은 안다. 단단한 몸 안에서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는 환희의 아우성에 바위는 때론 전율이 일어 부르르 떨기도 한다. 어떤 바위는 눈동자를 크게 열어 시작되는 하루를 지켜보고 있다. 나이 든 바위 하나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강물과 바람의 잔잔한 콜라보에 춤추듯 일렁인다. 바닥에 누운 어린 바위는 햇볕이 얼굴을 흔들어도 여전히 꿈속에서 뛰노는 중이다. 강가에 옹기종기 모여든 이곳은 바위 일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강물이 까만 수건으로 밤늦도록 하늘을 닦아놓고, 바람이 깨끗하게 비질을 해 놓은 산야의 아침. 맑고 산뜻한 하루의 창이 활짝 열렸다.


  어떤 이들은 바위의 삶이 따분하고 지겨움의 연속일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바위는 한마디로 바쁘다. 그는 우리가 일기를 쓰듯 자기 몸 안에 낱낱이 적고 있다. 날씨와 온도 같은 기상 상황이나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사건, 사고들을 빠짐없이 기록한다. 더구나 그는 사적인 감정이입 없이 누구보다 객관적이어서 사실 그대로 만을 적어 놓을 뿐이다. 그래서 바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위가 적어 놓은 언어들을 밤낮없이 해석하여 수억 년 동안의 과거를 정확히 읽어낸다. 그의 일기에는 태초의 혼돈 속에서 들려온 창조주의 '말씀'이 적혀있고 신화의 세계가 들어있다. 어느 날은 중생대 백악기의 트리케라톱스와 티라노사우루스가 뛰쳐나오고 우주에서 온 별똥별이 기다란 꼬리를 달고 날아들기도 한다. 바위의 몸에는 돌망치와 창과 칼날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바위는 역사를 피부에도 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바위는 우주의 도서관이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꺼내 읽어볼 수 있는 문서고처럼 바위는 무수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이제 그가 조금은 달리 보이는가. 바위는 마주 보고 있는 당신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적고 있다.

  

  바위는 산이 되기도 한다. 가장 낮은 바닥에 자리를 잡고 몸을 감추려 하지만 때론 우두머리가 된다. 산의 정상에 올라 아예 산이 되어 버린다. 바위는 천왕봉 정상에 서서 산들을 호령하며 산맥을 거느린다. 바위는 반도의 산들을 하나로 세워, 만주 벌판을 건너 시베리아로 달려가자고 웅변한다. 우리 국토의 7할이 산이므로 자연계에서 실제적인 영향력은 바위에게 있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한 환대를 받아야 한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 인간인 나 자신은 얼마나 미약하며 먼지처럼 가벼운가.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며 살아온 삶이 산에 우뚝 선 바위 앞에서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거대한 바위 앞에 무릎 꿇고 숨을 헐떡이며 그의 위대함을 찬양하게 된다.


바위는 꽃이다. 

강이 밀어 올린 꽃봉오리다. 천만년 지지 않고, 안으로 품은 담백한 향기에 강물에 사는 메기와 은어와 가재가 웅웅 거리며 날아든다. 강가에는 수달과 재두루미와 청둥오리가 상춘객처럼 모여들었다가 되돌아가곤 한다. 꽃은 무게만큼이나 존재감이 크다. 꽃을 꺾어보려고 비바람이 직구와 어퍼컷을 수 없이 날렸으나 오히려 시퍼렇게 멍든 몸으로 물러났고, 구름은 커다란 지우개를 가져와 꽃을 지우려 뻑뻑 문질렀으나 정작 지워진 건 자기 자신 뿐이었다. 햇볕도 따가운 눈총을 속사포처럼 쏟아부었으나 제 몸이 뜨거워져 제풀에 지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바람이나 햇볕은 벗이 되어 더불어 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세월과는 끝내 타협하지 못하였다.


   바위는 걸림돌이 아니다. 강에 딴지나 걸고 가시처럼 박혀있는 훼방꾼이 아니냐고 너는 묻는다만 절대 아니다. 바위 없는 강물은 평정심을 잃고 조급해진다. 균형을 잃고 서둘러 강을 빠져나가 버려 어린 물고기들이 접근하지 못한다. 역 없는 기찻길처럼 스쳐 흐르는 강물은 다양함과 풍요로움을 잃는다. 오히려 바위는 강의 지킴이다. 오랜 세월 깊이 뿌리를 내려 강을 붙들고 있는 이들이 바위이다. 바위만큼 강을 아는 이는 없다. 강의 마음을 이해하고 고난을 공유하며 다독여온 바위는 오랜 벗이자 멘토이다. 바위의 몸이 곡선이요, 타원형인 것은 뼈 없는 강물을 배려하여 날카로운 자신의 몸을 둥글게 깎고 다듬어 왔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표이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둥근 삶을 선택했다. 각자가 살을 깎아내는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바위는 집이다. 

바위는 존재 자체로 다른 이들의 안식처요 피난처가 된다. 깊은 산속의 바위에는 비바람과 폭설로부터 따뜻하고 아늑한 잠자리를 마련한 반달곰 가족이 있다. 강가에서는 가물치와 장어와 송사리들이 커다란 바위 아래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부모의 품에 몸을 맡긴 아이처럼, 어떤 존재가 그 자체만으로 생명이 되고, 기쁨이 되고, 의지가 될 수 있겠는가? 바위가 위대한 생명체인 것은 바로 이런 면에서다. 인류를 비롯한 대부분의 생명들이 자기를 위해, 최소한 피를 나눈 종족만을 위해 자신의 삶과 시간을 희생하고 고통을 감당하려 한다. 그러나 바위는 아무런 인연이 없어 보이는 온갖 동식물들에게 자신의 존재라는 집을 거저 주고 있는 것이다.


  경호강가에 나가 보아라. 저기 웃는 꽃이, 무표정한 꽃이, 성난 꽃이, 우는 꽃이, 사색에 잠긴 꽃이 보이지 않는가. 모두가 삶의 다양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이곳에도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다. 강가의 바위들은 바위로써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으며 사람보다 더 오래 살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안다. 쇠에 녹이 슬어 부스러지듯 바위도 세월에 풍화되어 언젠가는 쪼개어지고 부서져 흙이 됨을 안다. 그러나 바위는 죽지만 죽지 않는다. 영겁의 시간 후에 다시 바위로 태어나 산이나 강의 적소에 자리를 잡고 지구의 무게추 역할을 한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사막에 동식물이 살아갈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바위나 돌이 없기 때문이라고’. 바위의 존재로 인해서 그늘이 생기고 모래와 모래 사이에 빈 틈이 생겨 누군가 그 ‘사이’에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몸집이 크고 제 자리에서 스스로를 움직일 수 없다지만 바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다른 생명들이 깃들어 살 수 있는 것이다. 바위는 그래서 자연의 생명 유지를 위한 기둥이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바위는 꽃이다. 

강이나 들이 마음을 그러모아 빚어 올린 꽃송이다. 방문을 열고 나가 보아라. 투박하고 당당하여 사랑스러운 바위꽃, 홀로 꾸밈없이 삶을 받들고 있는 기둥꽃, 가슴에 보물을 품은 이야기꽃이 우리 곁에 있다. 집 마당귀에, 길가에, 산 중에 핀 바위를 보아라. 혹 바위가 고독해 보인다면 그대 자신이 외롭기 때문이다. 곁에 서 있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이런 때는 더욱이 바위 곁으로 가자. 홀로 머물러 그저 오랫동안 바라보면 바위는 그 무거운 입술을 열고 말을 걸어올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된 바위의 언어가 마법처럼 그대 귀에 들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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