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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Nov 24. 2024

황매산에 억새가 산다

앙(仰) 이목구심서Ⅲ -9


소나기처럼 축제가 지나간 뒤다.

행사장의 천막이 하나둘 떠나가고 나자 산등성이 억새는 주름이 늘었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눈맞춤 하느라, 그들의 수다를 죄다 듣느라, 형형던  눈동자 흐릿해지고 목은 뻣뻣하다.

생기 있고 윤기로 번들거리던 몸은 사람들 눈동자에 닳고 깎여나가 거칠어지고 야위었다.


가끔 뒤처진 일행을 기다리느라 억새처럼 목을 늘어뜨린다.

다들 휴대폰으로 풍광을 붙들어 매느라 바쁘다.

'싸르르 싸르르~'

바람에 억새가 노래한다.

아니면 바람이 웃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리는 숨바꼭질처럼 몸을 감추고 억새밭 사이를 오가며 노닐다 간다.

찰방거리며 흘러넘칠 듯, 몇 번의 일렁임이 능선을 따라 파도친다.

억새의 장황한 도열 한가운데에 홀로 우뚝  갈참나무를 본다.

그는 수천만의 억새들을 거느리고 정상을 향해 진격하는 장군의 모습이다.

그의 명령억새들이 허리를 펴고 일제히 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무는 몇 남지 않은 갈변한 잎을 흔들어가며 억새들의 무리를 지휘한다.

따르는 억새들의 얼굴은 긴장과 들뜸이 얼버무려져 하얗게 상기되어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한 곳으로 수렴된다.

정상 너머엔 더 광활한 땅이 펼쳐질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한 방향으로 돌리고 파도처럼 몸을 흔들며 산정을 향해 오른다.

일사불란한 갈참나무의 독려에 보름 동안 함성을 지르며 치달리던 억새는 온몸에 피곤을 입고있다.

그래서 그들의 몸은 무거워 눕고만 다.


발밑에 여전히 잎이 푸른 들풀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길섶에 쑥부쟁이와 구절초 꽃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주위는 꽃의 후광에 덩달아 밝아진다.

때 묻지 않은 산꽃의 미소다.

그 웃음을 바라보며 서로 미소 짓는다.

천왕봉과 제석봉이 저 멀리 뿌연 안개를 치마처럼 두르고 서 있다.

그 발치에 산청 읍내가 쪼그려 앉아있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언제나 소인국을 보는 것 같다.

땅 위에 힘겹게 그려가는 삶이 별게 아니란 생각을 매번 한다.

저 좁은 무대 위에서 아등바등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다.


아쉬움을 진하게 남겨두고 산을 내려온다.

꼭 정상에 올라서야만 산행이 아니다.

나의 삶이 목적지에 가닿지 못한다고 해서 의미 없는 게 아니듯.

발걸음마다 묻어나는 계절거기에서 오는 감동이면 충분하다.

아직까지 한 차례도 황매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주변에 하나 정도는 미지의 산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나는 자주 정상을 상상한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마음에 들어찰 황홀과 희열을.

상상 속의 황매산 정상은 매번 모습을 달리하며 자신을 보여준다.

오늘도 그곳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발길을 돌린다.


하산길에도 사진을 찍느라 자주 멈춘다.

평일인데도 산행하는 이들이 많다.

둘씩,

아니면 여럿이,

하나는 찾을 수 없다.


내려오는 길엔 보리수나무가 유난히 많다.

내 고향에선 보리똥, 경상도는 뻘(벌) 똥이라고 부른단다.

붉은 열매들이 가난한 집 아이들처럼 다닥다닥 붙어 가지채 늘어졌다.

바닥으로 가지를 잡고 열매를 주욱 훑어 입안에 넣는다.

새콤달콤하다.

주차장에 내려와 되돌아본다. 

멀리서 하얀 손바닥을 들어 흔들고 있는 이들이 있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

보리똥과 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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