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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May 08. 2023

앙(仰) 이목구심서 23

아버지의 유언

아버지의 유언


벌써 년이 지난 2월 어느 날이었다.

요양원 근무자 전수조사로 직장에서 코로나 검사를 하였다.

정해진 시간보다 좀 늦게 나갔지만 대기줄 맨 앞에 서서 첫 번째로 검사를 받았다.

이름의 한글 자음 순서로 검사한다고 하니 'ㄱ'이 연달아 있는 내가 제일 먼저였.

동료직원 오육십 명이 줄을 서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의료원 직원이 입과 콧구멍 깊숙이 넣어 숨은 보물을 도굴하듯 긁어 작은 통에 담아 간다.

나는 첫 번째로 서러워져 눈물이 핑 도는 통증이 되어 밀려오는 슬픔을 참아낸다.


난 타고난 성격이 느긋하여 언제나 말미에 서 왔다.

세상에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처럼 언제나 일부러라도 늦게 줄을 서고, 점심시간 식당에도 늦게 가 맛있는 반찬을 양보하며 살아왔다. 

첫 번째보다도 세 번째, 네 번째가 내겐 편했다.

언제나 처음은 새 옷처럼 어색했다.

어쩔 수 없다.

타고난 성격이므로 그러려니 살아왔다.


먼저 검사를 받고 돌아서는 데 직원들의 시선이 눈에 들어와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적잖이 낯설었으나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오랫동안 서서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기다림이 주는 원인 모를 긴장감으로 쉼 없이 노동하는 심장에 스트레스를 주지 않아도 되었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누구보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바보 같은 착각을 잠깐해 보았다.

결국 아버지께 감사할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고 실제로 직원들 앞에서 하늘을 향해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문득 핏덩이였을 신생아 때, 아버지는 나의 이름을 지으며 어떤 마음이셨을까가 궁금해졌.

서울 경에, 있을 재 곧, 서울에 있다, 서울에 산다는 의미로 특별할 것은 없어 보였.

아버지는 내가 성장해서 서울에 살기를 바라셨던 것일까.

전라도 수류 산골마을에 태어났으니 나라의 중심도시에서 화려하고 떳떳하게 살기를 바라셨던 것일까.

그렇다면 난 지금 아버지의 유지를 따르지 못하는 불효한 자식일 뿐이다. 

최소한 수도권에라도 살아야 하는 것인가.

오래전 아버지를 얼떨결에 보내드린 후 돌고 돌아 지금은 산청 지리산 자락에 기대어 살고 있으니 나중에 아버지를 뵈면 면목이 서지 을 것이다.


이름을 헛간의 암소처럼 느리게 느리게 반추해 보곤 하였.

경재, 경재, 경재, 경--재


이젠 내가 사는 곳이,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곧, 서울임을 알았다.
어디에 살든지 세상과 삶의 중심은 나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헛군데 한 눈 팔지 않고 똑바로 걸어가며 사는 곳이 나의 서울이다.

나에게 산청이 서울이다.

이곳엔 온갖 생물들이 모여 산다.

산엔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이 나름의 질서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곳은 자연의 서울이다. 

지리산은 나무의 서울, 약초의 서울, 고라니의 서울, 나의 서울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서울특별시민으로 살아가자.

내 마음이 곧 세상의 중심이니 내가 서울이요, 나라요, 광활한 우주의 중심이.


내 이름엔 아버지가 있다.

이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아버지도 존재한다.

나에게 이름을 주고 불러주셨을 아버지를 생각한다.

내 이름은 나 만의 것이 아니다.

내 것이며, 아버지의 것이며, 할아버지의 것이며, 조상님의 것이다. 미래의 자손들의 것이다.

내게서 소멸하지 않고 역사의 강물을 따라 계속 흐를 것이다.

그렇기에 내 이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번 생에서 나는 '내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 이름은 아버지 최초의, 최후의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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