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첫째 울림이가 수족구에 걸리는 바람에 내내 학교를 못 갔다. 가족들과 있을 때면 가장 시끄러운 녀석인데 둘만 있으니 집도 울림이도 아주 조용했다. 둘이 있어도 하루종일 떠드는 막내 ‘우리’와는 달리 함께 있는데도 각자의 생각에 더 많이 빠져 있는 울림이를 보며 사춘기 아들을 두었다는 것을 새롭게 실감했다. 대들고 싸울 때는 ‘빌어먹을 사춘기’라며 자주 내적 고함을 쳤는데, 같은 공간에서도 자기의 시간을 보낼 줄 아는 것도 사춘기라 생각하니 반가운 일처럼 느껴졌다.
울림이는 사춘기에 접어들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놀아야만 하는 공간을 쓰고 있다. 그래서 울림이는 자주 신경질이 난다. “누가 내 물건 만졌어!” "리코더 다른 데서 불면 안돼?" “신경 쓰이니까 그만 좀 쳐다봐.”(컴퓨터로 숙제하는데 동생들이 옆에 붙어있음) 그러고도 분에 못 이길 때는 이제 아파트라도 좋으니 자기 방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 아이를 보면 나도 같이 마음이 심란해졌다. 집 짓기의 꿈은 있었지만 이렇다 할 절박함 없이 지냈던 우리에게 절박한 마음이 들게 한 첫 번째 이유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울림이에게 방을 주어야 한다.’ 내년이면 중학교에 들어가는 아이에게, 자기의 물건 소중히 하는 아이에게, 새벽에 일어나 혼자 보내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에게, 그렇게 여태 잘 버텨준 고마운 울림이에게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
(요즘 울림이가 인터넷에 올린 사진 다 지우라고 해서 최근 사진은 더욱 못 올린다. 언젠가 있던 사진이 사라진다면 들킨 것으로 생각해 주시길...)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은 마을 가장 끝에 산 아래 있는 통나무집이다. 올해로 7년째 살고 있다. 막내 ‘우리’가 태어난 지 6개월쯤에 왔는데 이 녀석이 벌써 내년에 학교를 간다. 업혀 다니던 아이가 걷고 뛰고 말하고 쓰는 시간을 오롯이 이 집에서 보냈다고 생각하니 7년이라는 시간이 짧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우리 가족의 첫 번째 주택 살이었고, 이곳으로 온 것을 절대 후회하진 않지만,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우리는 분명 다시 이곳으로 올 테지만 정말 쉽지 않은 집이었다는 것 또한 명확하다.
이 집의 장점은 시골에서 구하기 어려운 전셋집이고(대부분 매매나 연세로 나온다), 마을의 가장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우리만의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매일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고, 아주 특별한 이웃을 만날 수 있고,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출입이 어려워 마당에 풀을 잔뜩 자라게 해 놓고도 혼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점에 대해 가장 많은 감탄은 하는 것은 신기하게도 남편이었다. 내가 이런 남편의 태도에 대해 ‘신기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유독 이 집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대문자 T남편과 대문자 F인 나의 성향이 바뀌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 집에 처음 방문한 친구들이 “이 집에서 사는 거 어때?”라고 물으면 남편은 ‘이 집에 살게 되어 우리 삶이 얼마나 윤택해졌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그럼에도 이 집의 실태는 얼마나 처참한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일 저녁 이 집으로 들어오는 길은 얼마나 놀라운지 몰라요.”
“이 집이 진짜로 홍성에서 제일가는 노을 맛집 이라니까요.”
“가을에는 집 안으로 반딧불이도 들어와요.”
남편이 이런 말로 감탄하면 나는 옆에서
“반딧불이가 집으로 들어온다는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이 집 어딘가에 반딧불이가 들어올 만큼의 틈이 있다는 거예요.”
“지네 물려본 적 있어요? 저는 한 번에 세방을 물렸다니까요.”
“저희 집 마당 보셨죠? 풀 자라는 속도가 말도 못 해요.”
라고 말하는 식이다.
우리가 살기 전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걱정부터 해주었고, 5년쯤 지났을 무렵부터는 걱정의 눈빛이 존경의 눈빛으로 바뀌었다.(역대 세입자 중 우리가 가장 오래 살고 있는 중이다) ‘통나무 집’이라는, 주소를 적을 때마다 미소를 짓게 되는 낭만적인 이름만큼이나 이 집의 모습은 한 폭의 동화 같다. 2층에 3층다락까지 있는 이 집을 처음 보면 그 규모에 압도되어 감탄한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오면 느낌표는 곧장 물음표가 된다. 특히 주 생활공간인 1층은 방 2개와 주방과 작은 거실이 이어진 형태로 되어 있는데 마루와 부엌은 다섯 식구가 오밀조밀 붙어 있을 수 밖에 없는 크기이고, 2개의 방은 하나의 방 안에 아주 작은 방이 하나 더 있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실험적인 구조이다. 더불어 이 집의 주 소재인 통나무는 너무나도 친 환경적이어서 인간뿐만 아니라 온갖 벌레들에게도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들이 침투가 어마무시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어릴때는 이런 불편함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꼭 우리 집이 아니어도 오래된 주택에서는 쉽게 나타나는 일이고, 그런 면에서 다섯 식구가 살기에는 좀 좁고 비효율 적이라는 것 외에는 이 집에서 사는 장점으로 얻는 것이 더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집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점점 늘어나고, 나도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나니 큰 일 아니라 생각했던 불편함들이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쥐와 친구 하며 살았다는 권정생 선생님과는 달리 나는 모기 한 마리에도 요란을 떠는 사람이었고, 아이들이 커가며 생기는 여유를 집에서 충분히 누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적어도 지금보다 조금 더 효율적인 집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집을 짓고 싶은 두 번째 이유였다. 경제적 효용을 넘어 불필요한 동선을 줄이고, 불편함과 불쾌함을 줄임으로써 덜 소모적인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가 다음 집에 바라는 효용이었다.
나에게 집은 꽤 오랜 시간 먹고 자고 싸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주택, 빌라, 기숙사, 자취방 등 여러 집을 거쳐 왔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특히 부모님 품을 떠나 대학에 가면서 하숙을 했을 때나, 친구랑 둘이 네 평짜리 단칸방에 살 때도 내 짐 둘 수 있고, 언제든 가서 잘 수 있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 방에 가는 날 보다 친구들 방에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애정이랄게 없고, 그래서 낯설고 불편할 때가 많았던 내 방에 가는 것보다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친구들의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중 가장 많이 갔던 곳이 남편의 자취방이다. 내가 남편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에 8할은 그 자취방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곳에서 우리 사이에 역사적인 일들이 많이 생겨서이기도 하지만 그 방이 주었던 분위기나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둔 그 공간이 매우 낭만적이었기 때문이다. 1.5룸에 꽤 오래된 자취방이었고, 작은 부엌과 이어진 마루 공간, 그리고 방 한 칸이 있는 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벽장에는 친구들과 먹었던 술병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앞에 작은 술집을 연상 캐 하는 식탁과 은은한 조명이 매력적인 집이었다. 남편은 그 책상 옆에 커다란 달 포스터를 붙여 두고 그곳을 ‘달방’이라고 불렀다. 집에 이름을 붙여 주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술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 사람이 그 방 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나는 매일 그 집에 가고 싶어 핑계를 댔다. 과제를 해야 하는데 도서관 문을 닫아서,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근처에 맛있는 집을 찾아서, 돌아가는 길이 멀어서, 술에 취해서, 그 방이, 네가 보고 싶어서.
이 사람을 만나고 알게 되었다. 집이란 단순히 먹고 자고 싸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들을 가득 채우고 매일 그것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곳, 내가 가장 안전하고 완벽하게 풀어헤칠 수 있는 곳, 때 뭍은 이야기들이 쌓여가게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나도 그런 집을, 마음껏 가꾸고, 바꾸고, 꾸밀 수 있는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우리가 함께 살 집을 그리며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것이 정말로 가능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