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샀다.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땅만’ 사둔 상태다. 지금 우리 땅 위에는 이전 땅 주인이 지어 둔 커다란 하우스 하나와 지난여름 무자비하게 자라난 풀만 가득하다. 겨울에는 시멘트가 굳지 않아 시공이 어렵기 때문에 아마 우리 집은 빨라야 내년 6월~7월이 되어야 완성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연재를 너무 빨리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제사 들기 시작했으나 나는 원래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책임지는 편) 아마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매일 ‘망했다’만 수십 차례 외치게 되겠지. 지금 이 순간처럼.
이번화에는 장장 12년 만에 드디어 땅을 사며 겪었던 에피소드를 적고 싶었다. 괜찮은 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고, 마음을 먹고, 엎었다가, 다시 조율하고, 맴돌다가, 결국엔 극적으로 타협하게 된 이 과정이 너무나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쓰기 시작하면 원고지 50장은 거뜬히 넘길 수 있다 자신했다. 하지만 막상 쓰려고 보니 하나같이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이야기뿐이라 안타깝게도 쓸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부터 나의 멘붕이 시작되었다. 글을 쓰며 알게 된 나의 안 좋은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가 막히거나 어느 지점에서 이번과 같은 멘붕에 빠지게 되었을 때 자꾸만 샛길에서 땅굴을 판다는 거다. 그러고는 결국 ‘나는 왜 쓰는가’(혹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까지 가고 남편의 쓴소리를 듣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린다.
어쨌거나 진짜로 땅을 샀다. 이 글에 제목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벌써 세 번째 땅을 샀다고 말하는 중인데 그 이유는 아무리 여러 번 외쳐도 우리가 땅을 샀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내 이름으로 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농촌에 살기 시작한 지 올해로 12년 차. 우리는 해가 갈수록 자꾸 이런 말을 하는 날이 늘었다. “그때 그 땅 사놨어야 했는데.”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 도시 집값만 하겠냐마는, 시골의 땅값 역시 해가 갈수록 높아졌다. 이번에 땅을 살 때도 어김없이 그런 마음이 올라왔다. ‘몇 년 전에만 샀어도 평당 10만 원은 싸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것만 해도 차 한 대는 뽑았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만 배가 아팠다. ‘세상 모든 물가는 오르는데 인건비만 안 오른다’ 던 친구의 말이 떠올라 씁쓸해지기도 했다. 이런 억울한 마음을 동네 언니들한테 이야기하면 대부분 이렇게 말해주었다. “앞뒤 따지지 말고 진짜 마음에 들면 그냥 사야 돼. 집 짓는 사람들이 그러더라, 집이고 땅이고 제일 싼 때는 지금이라고.”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는 우리 동네 시세를 듣고 놀라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건 오른 것도 아니야. 이 동네는 거기 땅값에 다섯 배도 넘어.” 시기에 따라 다르고, 지역에 따라 다르고, 심지어 같은 동네여도 땅 주인에 따라 땅값이 달라졌다. 제멋대로 날뛰는 땅값을 보며 ‘지금이 제일 싼 때’라고 말한 언니들의 말을 계속 떠올렸다.
그런 마음으로 이 땅을 보게 되었다. 시골에서 보기 드문 300평 이하의 땅이었고(대부분 농지로 된 큰 땅을 판다), 집 지을 수 있는 터가 어느 정도 마련 되어 있는 데다(평지일수록 토목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아이들 학교와도 가깝고, 바로 앞에 아이들과 친한 또래 친구네 집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변에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골짜기처럼 생긴 지형이 주는 아늑함과 마을 중심지와도 떨어져 있어 적당한 거리감을 준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알면 알수록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그런 땅이었다. 자꾸만 발길이 그곳을 향했다. 낮에도 가보고, 저녁에도 가보고,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에서도 보았다. 막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땅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집에 와서는 디스코 앱을 켜고 집 짓고 땅 파는 친구들을 귀찮게 굴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우리의 앞으로를 계획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집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자마자 귀촌을 했다. 처음 3년은 전라북도 완주, 이후 지금까지 9년째 홍성에 살고 있다. 큰아이 울림이가 11월에 태어났는데, 그때쯤 신혼 살림 하던 남편의 자취방 계약 끝나는 시기와 맞물려서 내가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남편 혼자 집을 구하고 혼자 이사를 했다. 우리의 첫 귀촌활은 거기서 시작 되었다. 작은 빌라였고 방 두 개에 아담한 거실과 부엌이 있는 세 식구 살기에 알맞은 집이었다. 그다음은 둘째를 안고 조금 큰 규모의 아파트에, 그다음은 셋째를 안고 지금 살고 있는 통나무집에 살고 있다. (어쩌다 보니 새로운 집에 갈 때마다 애가 하나씩 늘어났는데 전혀 의도한 바가 없다는 것과, 앞으로도 없을 것을 이 자리를 빌어 선언한다.)
이사를 할 때마다 땅을 사거나 집 짓는 것 역시 항상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언젠가의 영역이었다. 여러 가지 상황과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정착에 대한 부담을 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지역살이를 하면서도 힘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평생이라는 말로 너무 꽁꽁 묶여버릴까봐 겁이 났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살고 보니, 땅까지 사고 보니 정착이란게 뭐 별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년도 이렇게 금방 갔는데 20년 30년도 금방이지 뭐, 하게 된다. 지역에서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묶이거나 엉키기보다 적절한 거리를 찾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아이들, 반찬가게 할머니들, 매일 아침 아이들 등교 길에서, 빵집에서, 도서관에서, 운동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매일 같은 자리에서 보는 것.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매일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는 걱정하지 않는다. 땅을 사는 것도, 집을 짓는 것도, 오래 보게 될 사람들과의 관계도. 특별한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 평범한 매일을 쌓아 가는 것이 더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특별함을 더 오래 누리기 위해, 우리는 이곳에 땅을 사고 집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