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기억_1
감나무가 있는 집에 살았던 때가 있다. 집안 사정에 맞춰 급하게 구하게 된 하숙집(부모님 지인의 집)에서 한 학기를 헤매고, 나와 비슷한 고민으로 학교 근처에 방을 구하고 있던 친구를 만나 구하게 된 집이었다. 다세대 주택 2층, 반 실내 주방과 네 평 남짓 방 한 칸, 그 안에 사람 하나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화장실 하나가 딸려 있던 집. 대학교 1학년 2학기에 구하게 된 첫 자취방이었다.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20만 원. 저렴한 가격에 볕이 잘 드는 집이었다. 무엇보다 같이 집을 보던 친구네 엄마가 주인집 안 마당에 있는 커다란 감나무를 보고 터가 좋은 곳이라며 마음에 들어 했다. 매일 아침 학교 가는 길에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아주 괜찮은 집에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록 우리는 먹지 못할 감이었지만 매일 아침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를 보는 게 좋았다.
방 안에는 행거 하나, 가로로 눕혀 놓은 4칸짜리 책꽂이 하나, 소형 냉장고 하나, 그리고 세 줄짜리 서랍 하나가 전부였다. 그 물건들 사이에 친구와 내가 누우면 방안이 가득 찼다. 우리는 밤에 불을 끄고 누워 이런 얘기를 나누며 키득댔다. “만약에 나중에 우리가 애를 낳으면 우리가 이런 네 평짜리 방에서 살던 날도 있었다고 꼭 얘기하자.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들었던 여러 무용담들처럼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그 친구와 나는 여러모로 잘 맞았는데 특히 가난에 대한 태도나 생각이 잘 맞았다. 학교에서 빈 페트병에 물을 가득 채워 오거나 남은 음식을 싸 오면서 서로를 칭찬했다. 가끔은 각자 집에서 챙겨 온 반찬으로 아침을 먹고 같은 반찬으로 점심 도시락을 싸간 뒤 집으로 돌아와 같은 반찬으로 저녁을 먹었다. 가끔 술이 먹고 싶을 때는 집 앞 동네 슈퍼에서 소주 한 병과 새우깡을 사갔다. 소주를 까서 딱 한 잔만큼 나눠 먹고 그만큼의 매실효소를 넣어 매실주를 만들어 마셨다. 아주 달고 맛있었다. 거기에 새우깡 한 봉지를 나눠 먹으며 나중에 자식에게 들려줄 무용담이 하나 더 생겼다며 좋아했다.
노동운동현장에서 만난 부모님이 대도시 부산에서 충북에 어느 시골 마을로 떠나 온 것은 내가 갓 초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계속 시골에 살았다. 내가 다녀 본 학원은(지금까지도) 몇 년간 다녔던 피아노 학원과 중학교 때 친구들 따라 두세 달 다 속셈학원이 전부다. 매일 화가 나있던 청소년기를 제외하면 엄마랑 산에 올라 나물을 뜯고, 아버지와 텃밭 일을 하며 벌레를 잡고, 고양이랑 대화하는 동생을 자주 놀려먹고,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이랑 걷고 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그런 것들이 그저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게 당연했던 시골 생활이 사실은 아주 특별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도시로 대학을 가면서였다. 도시의 화려함에 신이 났던 건 아주 잠시 뿐이었다. 중학교 때 친구랑 NELL 오빠들을 쫓아다니느라 가끔 롤러나 다녔던 도시와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도시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그 다름 속에서 자주 헤매었고 고요했던 시골에서의 시간들을 그리워했다. 도시는 나무보다 사람이 많고 어두운 밤은 찾아오지 않았으며 나는 계속 가난했고 가난한 사람이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내 주변엔 대부분 나처럼 가난한 친구들이었고 그 친구들과 추억을 쌓아 가는 것이 그나마의 행복이었다.
감나무집 생활은 그리 길지 않게 끝이 났다. 다음 해에 다른 친구 한 명과 조금 더 큰 집으로 가기도 했고, 나는 집에 들어가는 날이 점점 줄었고, 졸업과 결혼과 귀촌 등으로 순식간에 대학생활이 끝났다. 지금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둘 다 애 엄마가 되어 매일을 치열하게 보낸다. 둘 다 애 키우느라 바빠서 연락도 잘 못하지만 나는 가끔 그 친구를 떠올리며 우리의 첫 자취방과, 키득대던 그 밤과, 매실주와 가난, 그리고 감나무를 생각한다. 먹지도 못하는 감나무를 보며 좋아했던 그때처럼 다시 돌아가지 못할 그 시절을 떠올리며 좋아한다. 언젠가 아이들이게 감나무집 무용담을 전해줄 날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