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짓기 밥짓기
<White Heart Suit> (이연경, 박도윤 부부전시, 포에버 갤러리, 19.03 ~ 26. 03)전시를 만나던 볕 좋은 오후, 유리문에 적힌 흰 글자가 태양선을 따라 저물고 있었다. 종이와 연필 스케치 드로잉의 여린 선들과 흰 색 말들, 찢어진 조각을 이어 붙인 말 덩이, 매트리스에 누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시트 밑에 숨겨진 말들이 요란하지 않게, 소란하지 않게 봄 햇볕만한 한 줌 따뜻함으로 무언가를 감싸고 있었다. 하얀 사랑을 짓는 조용한 말들이었다.
사랑-하기/-만들기/-얻기.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보다 잘 알지 못한다. 사랑을 하나의 객채로 본다면 나는 '사랑'이라는 상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고 싶은가. 또는 '사랑'은 삶이나 사람의 재료일까. 사랑이라는 재료를 받고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건지 당황해 허둥거린다.
사랑한다는 말은 어떤 것들을 내포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본능대로, 그동안 인류가 해 오던 대로 한다. 울고 웃고 피부를 맞대고, 무형의 형태와 윤곽을 만들고 그것의 견고함과 확실성에 기대어 살아간다. 관습화된 -하기, 들에 가끔 한 번씩 반향이 일어나고 양심의 죽음, 윤리의 죽음과 같은 무언가 잘못된 방식에 저항하기도 한다. 좁은 의미로 말하자면 여성들이 사랑하는 동안 벌어진 관습에 저항하는 방식이 있다. 그런 방식은 아주 선명한 색채와 어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너무 강렬한 탓에 색채만 잔상으로 남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선명할 수 없고 저항하거나 튕겨내지 않는다. 오히려 연약하고 흐물거리며 뚜렷한 색채 자체가 아니라 우리를 뚜렷하게 만드는 색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사랑을 짓는 것은 묵묵한 일이다. 글을 짓고 밥을 짓는 것과 같다. 하나의 관게가 -굳이 가정이 아니라고 해도- 나름의 형태를 갖추어 가도록 우리는 부지런히 사랑을 지어야 한다. 품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고 별스럽지 않은 수고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 일은 검은 글자의 단단한 말이 아니라 흰 글자의 조용한 말이다. 대신 많다. 그리고 여리다. 내가 전시를 보며 감동했던 것은 그 여리고 희고 무수한 말들이다.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많고 자잘한 말들로 지어지는가.
희고 무해한 자잘한 말들, 입 안에서 데굴 데굴 굴러다니다 쉽게 녹는 밥알 같은 말들이 얼마나 우리를 만족시키는가.
밥을 짓는 것은 곧 사랑을 짓는 것. 밥알은 선명하지 않고 딱딱하지 않으며 뚜렷한 맛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밥알은 어머니의 잔소리고 밥상머리의 애정이다. 밥알은 고슬고슬하게 익어 짜고 시코 달고 매운 반찬을 덮어주고 허기를 달래준다. - 나는 밥알을 먹지 않는 체중조절기의 분노가 사랑의 결핍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는 점을 남몰래 주목하고 있다. -
이연경작가의 작품은 연약하고 물에 쉽게 녹는 종이를 재료로 하고 있었다. 박도윤 작가는 희고 가벼운 석고 가루에 찍는 흔적을 기록한 것이다. 그들의 화법은 희고 가볍고 금방 날아가서 눈에 선명히 보이지는 않는 섬세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흰 이야기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깨달음을 배웠다.
먼지로 사라지는 우리 육신과 흩어지는 삶에서 사랑을 짓는 흰 말들, 흰 점이 만드는 흰 종이가 흔들린다. 이 종이 위에 사랑의 이름을 쓰는 일이 사랑을 짓는 일이다.
인간은 드물게 흰 눈자위가 많은 동물이라는 점을 좋아한다. 흰 눈자위가 넓으면 검은 자위가 방향과 감정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잘 보이기 때문에 야생의 동물들은 흰 자위의 면적이 적다고 한다. 나는 흰 자위가 많은 인간의 연약함을 좋아한다. 잘게 떨리는 흰 자위의 축축한 눈빛이 사랑에 휘말린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을 좋아한다. 흰 눈자위 위에 검은 자위로 상대를 비추는 일이 사랑을 짓는 일이다.
사랑을 짓는 것은 인간의 부드럽고 연약한 육체다. 사랑이 짓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난 자리에 남는 눈에 보이지 않는 따뜻함이다. 사랑으로 짓는 것은 영원하지 않는 허약한 인간의 마음의 누울 자리다.
입에 침이 고였다. 늦은 오후에 허기가 졌다. 흰 말들이 뱃속으로 떼도적같이 밀려들었다. 밥밥밥밥밥....(*<밥>의 오마주) 밥 생각이 난다.
*
밥
김두안
산부인과 회복실 스피커에서 막 태어난 아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밥밥밥밥……
-『달의 아가미』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