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주운 생각들 3 | 생흔,영수증으로 증명되는 삶

내 존재를 증명하는 숫자와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대하여

by Ggoc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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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흔, 영수증과 숫자와 그 밖의 것들



오늘 나는 4개의 영수증(전자 영수증)을 발행했다.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한 밀크티 5600원, 순두부 우둥 한 그릇 10900원, 새로 나온 1 + 1 자양강장제 2000원, 내일 아침에 갈아 마실 토마토 300g 4990원. 그 중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16개의 카드 숫자번호와 사업자 숫자와 방문 일시 숫자의 삼각지대 사이에 서로의 합법적 존재를 증명하는 부가세같은 것들이 원단위로 찍혀있다.

이 영수증이 오늘 내가 살아있었다는 생흔, 생존의 흔적이다. 영수증이 더이상 발행되지 않으면 내 존재는 의심되거나 그냥 흐지부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싶지 않다.


행정서류는 사람을 종이와 숫자로 인식한다. 나는 행정상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거주지의 지번과 연락처 번호와 생년월일이 들어간 주민등록번호로 나의 존재증명서를 만든다. 그러나 그보다 오늘도 내일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은 영수증이 좀 더 확실하게 보증한다. 내가 이동했던 경로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그정도 거리를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보증해준다.


돈이 중요한 세상이라고 모두 인정한다. 신혼부부는 아기를 육아에 드는 비용으로 먼저 계산하고 품는다. 뱃 속에 품은 생명은 숫자 생성기이다. 화폐를 만든 것이 사람이라서 화폐가 있는 곳에 사람이 있다고 증명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야생동물이 뜽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 고차원적이라 조금 위안이 될 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똥이 내 생명 신호를 알려주는 증거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똥은 자연스럽게 나오지만 돈은 그렇지 않다. 생명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생기지만 돈은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니 같은 맥락선상에 놓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화폐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신뢰하는 수단이다.


나는 AI와 달리 숫자로 구성되지 않는다. 숫자로 체계를 인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계산을 잘하지 못하고 산수와 수학과 경제지표에 아둔한 사람으로 컸다. 다만 나는 숫자로 증명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내 살과 피로 생명의 신호를 확인하고 감촉과 냄새와 소리로 나를 증명하고 싶다. 꼭대기에 달린 머리로 숫자가 아닌 다른 기호를 굴려 발음하고 재료로 쓰는 삶으로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



사람의 생흔은 사람에게 남는다



생흔화석을 좋아한다. 생흔학을 배우고 싶다. 고생물의 사체가 아니라 생물이 살았던 흔적이 남은 땅의 역사가 좋다. 느물 느물 기어다닌 흔적, 발자국, 배변 흔적, 점액질의 흔적. 그런 흔적이 단단하게 남겨진 화석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렇게 단단한 생의 순간이 내게도 가능할까, 회환과 기대가 동시에 차오른다.


나의 생흔은 어떤 형태로 남을까. 내 카드내역서, 세금을 비롯한 소비의 흔적들, 입고, 먹고, 마시고, 거주하는 모든 것에 붙는 영수증으로 삶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일까. 카드사는 내 소비패턴을 분석해 준다. 이번 달에 가장 많이 소비한 곳은 카페입니다. 이번 달에 가장 자주 방문한 카페는 후암동에 있는 프리잔테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횟수는 46회다. 한의원을 주 2회 방문했다. 친환경 정책으로 종이 영수증을 발행하지 않아도 전자 영수증은 데이터로 남아 있다. 오히려 더 무섭다. 나는 받아보지 못하는 나의 생흔 데이터는 카드사와 통신사가 제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 존재를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내 존재를 존중해주지도 않는다.


사람의 생흔은 사람에게 남는다. 사람의 마음에 남는다. 고작 영수증 따위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사회에 희망이 있을까? 사회적 인간이라는 말은 모두와 소통하며 어울릴 수 있는 사람-사람을 의미하고 사회적 인간으로 사는 한 사람은 사람에게 생흔을 남긴다. 사건이 생기면 기자는 이웃과 친인척, 지인을 인터뷰한다. 흔적을 찾는 것이다. 범죄의 경우에는 영수증과 이동경로의 흔적이 더 앞선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생흔을 괄시하는 사회는 나를 푸코의 음모론을 믿게 만든다.


내 주변의 생흔들을 본다. 오로지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기록해 주는 것은 나의 사람들이다. 나도 또한 내 사람들의 생흔이다. 우리는 서로의 생흔으로 이 사회의 일원임을 증명한다. 그들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격의 증명부터 사랑과 증오와 안타까움과 아련함이 뒤섞인 내 현존의 흔적이다.

요즘은 '손절'을 쉽게 말한다. 연락을 끊는 것도 쉽다. 연락을 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연락이 어려웠던 때에는 연락을 끊는 것도 어려웠다. 난이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생흔이 문제다. 서로의 생흔이 되어주는 일종의 미약한 책임, 기억과 감정유대의 책임을 회피하고 또한 회피 당한다. 그런 식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인간의 생흔은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한다.


영수증을 정리한다. 내 생흔과 함께 밥을 먹었다. 영수증의 숫자보다 내 생흔과 먹은 메뉴와 시간과 식당 분위기와 나누었던 대화와 감정이 흔적없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는 내 생흔, 친구와 가끔 지난 흔적들을 이야기 한다. 그에게 나는 만육천원짜리 영수증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도, 한 시간 넘게 웃고 떠들며 오만가지 말의 흔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는 더이상 나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내 생흔이고, 그를 위한 영수증은 아무런 뜻이 없다. 아무런 증명도 하지 않는다.


2025.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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