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IT 에 발을 담그고, 기획자라는 타이틀로 일을 해온지가 벌써 17년이다.
20대 후반부터 팀장을 달면서 리딩을 했었고.
그때부터 쭉.. 오랫동안.. 리딩을 해오는 것 같다.
많은 기획자들을 만났고, 많은 기획자들이 내 밑을 지나갔다.
난 그들에게 어떤 권한을 행사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맡겼다면, 그들의 직분/나이/능력 그 어떤것과도 상관없이
그 사람의 기획서는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왜 그렇게 했냐고 물어본다.
기획의도. 방향성. 컨셉. 무슨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만들었는지.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없을수록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냥.. 다른데 그렇게 되어 있길래.. 보통 그렇게 하지 않나요?
그들의 대답은 그렇다.
그나마 자기만의 주관과 기획철학을 가지고 대답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적어도 그 친구는 내 눈에 드는 친구다.
그게 틀렸든 맞았든 상관없이, 자기 기획서를 두고 나름의 고민을 했다는 증거니까.
특히나 서비스의 방향과 컨셉을 두고 대화를 나눌때는 아주 즐겁다.
그럴때는 방향과 컨셉의 일관성을 잡아주는 일이 내 역할이다.
오히려 그들의 아이디어와 생각은 독특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일관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고, 깊이가 없는 단점이 있기에
그걸 잡아주면 그들은 또 곧잘 따라온다.
훌륭한 기획자의 경우다.
난 지금까지 훌륭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기획자를 두명 만나봤다.
그 중 하나는 송도 현대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마카롱 매장 매니저를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대기업 대기업 하더니, 결국 SK 계열사 들어가서 잘 다니고 있다.
둘 다 공교롭게도 여자다. 내가 여자 기획자를 좋아하나?
분명, 여자 기획자가 남자보다 훨씬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타고난 논리적 두뇌와 기획력을 가진 친구다.
이런 친구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배우게 된다.
기획자라는 틀 안에 기획서를 만드는 스킬, 모델링 하는 스킬을 가르치고 싶지 않은 친구다.
후자는 무섭다. 뭔가를 시켜두면 어금니 꽉 깨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과물을 갖고 오는 매력이 있다.
무섭다 이 친구는. 애 둘을 낳고서도 꿋꿋이 직장생활 잘 해내는 모습은 같은 여자로써 자랑스럽다.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서 내 기획서에 빨간펜을 칠하고, 구구절절 변경한 PDF를 하나 받았다.
당황스럽다. 난 지금까지 한번도 내 밑에 기획자의 기획서에 그런식으로 손을 대본적이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누가 무슨 기획서를 만들었든 내 역할은 더 훌륭한 기획서가 그사람의 손에서 나오게 만드는거지
그 사람의 기획서를 손대는건 아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하는 사람들.
만들어둔 유에서 방향과 컨셉에 대한 이견은 얼마든지 존중한다.
프로세스에 대한 의견도 존중한다. 그리고 난 그런 의견들에 감사한다.
하지만 오늘의 빨간펜은 그런게 아니었다.
내 기획서의 방향과 컨셉은 그대로 두되, 문구 표현 방식을 바꿔버리고
버튼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기획서는 기획자의 성격을 반영한다.
그렇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기획자의 인성이 반영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내 기획서를 보고, 자기만의 스타일로 바꿔 나에게 다시 준다.
그리고는 리뷰 의견일 뿐이라고, 확인해달라고 한다.
우리는 디자인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우리모두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훌륭한 디자인을 평가할 수 있다.
어느 누군가가 내 맘에 드는 디자인을 가져 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 디자인의 빨간색을 핑크로 바꾸라고 요청할 순 없다. 그건 갑이 을에게 가능한 요청이다.
우리가 그 디자인에 대해 의견을 말 할 수 있는 부분은 방향과 컨셉이며 분위기이다.
차마, 퀄리티에 대한 부분도 우린 절대 언급할 수 없다.
왜냐면 상대는 우리가 함께 일하기 위해 믿고 의기투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뢰를 전제로 함께 하는 사람에겐, 예의를 지켜야 한다.
오늘 내게 PDF를 준 사람은 우리가 의기투합한 사람들의 리더이다. 사공중의사공이다.
아이디어를 서비스화하고, 서비스를 기획서로 옮기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논의를 했다.
기획자가 가진 능력은 남들이 말로 SNS를 만들어보자고 하면,
그걸 실제로 구현해 내는 일이다.
쉬운것 같지만, 막상 해봐라. 1-2페이지라도 화면의 진전이 있다면 박수를 쳐줄것이다.
많은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기획자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만들어낸 결과물이 뻔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그안에 있는 컨셉, 방향, 페르소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기능, UI, UX만을본다. 그러니 세상에 있는것과 기획자들이 만들어 낸 것의 차이를 잘 모른다.
또는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기획자의 의도임을 그들이 믿는다면, 쉽게 함부로 무시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디자이너와 개발자들이 관리자의 역할로, 기획의 포지션으로 옮겨 오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얘기한다. 기획자들은 정말 대단한것 같다고. 해본 사람들은 안다.
그렇지만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쉽게 무시하고 쉽게 판단한다.
특히나 기획자에 대해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일부 기획자들이 머리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기획자는 모두의 생각을 모으고 아이디어를 취합하고, 그것들을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용자를 위한 기능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기획자의 아이디어가 옳고 기획자의 방향이 옳다고 고집부리면, 무시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기획자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하고, 어떤 이유나 컨셉이나 방향성이 있어 그렇게 만들었음을
믿어야 한다. 서로간에 믿음이 없으니 쉽게 무시하게 되는데,
그들이 디자인하고 개발하는 것은 결국 기획자의 기획서를 따라서지, 다른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것이 세상의 시선을 받았을때, 그들은 나서서 얘기한다. 그거 내가 디자인했다고. 그거 내가 개발했다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획을 탓하고, 프로젝트 리더를 탓하고, 고객사를 탓하겠다.
기획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사람들의 본성이며, 어쩔 수 없는 자기회피의 대표적 방법이다.
잘되면 다들 내 덕이고, 안되면 다들 남의 탓이다.
쉽게 조롱하고 무시하는 기획서를 따라서 만든다면, 그 디자이너나 그 개발자나 무엇이 다른가?
기획서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된다면 무시하고 조롱하기 전에, 더 나은 기획서를 만들어내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같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팀원으로써의 훌륭한 모습일 것이다.
나는 내가 꽤 괜찮은 기획자라고 생각했다.
내 결과물에 대해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순 없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꽤 괜찮은 기획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17년간의 기획 경력을 가지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도
디자이너나 개발자가 보기에 좋은 문서를 위해 고민하고 있고
오랫동안 해오던 기획의 습관과 관습을 점검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른데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이유로, 평소에 그렇게 해왔다는 이유로
그런 이유로 기획서에 기능을 배치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보다 어리다고, 나보다 경력이 짧다고 상대를 무시하는 일이 없으며
난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존중하며 귀담아 듣는다.
다만, 내가 가진 경험과 논리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잃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그들이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난 그들이 무엇을 잘하는지 파악하며,
그들이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인도하고자 한다. 그게 다다.
내가 나이가 많고, 내가 그들의 리더로 있고, 내가 직책이 높다는 이유로
내가 해야 할일은 결정적 순간에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책임지는 일.
그래서 나는 결정할 권한을 갖는다. 책임지기 위해서.
돌아가서
오늘 내게 PDF를 건넨 사람과 나는 대화를 했다.
일을 맡겼다면, 존중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사람은 내 얘기를 듣기보다
자기가 얼마나 올바른 행동을 했는지를 설명하기에 바빴다,
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다그치기에 바빴다.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은 다 맞았고, 나의 모든 행동은 다 틀렸다.
실망스럽다.
내가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그저 내 얘기를 들어 달라는 요청일 뿐인데
상대가 더 많은 상처를 받은 양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극단적 결론으로 혼자 끌고 간다.
대화하기 힘든 사람.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
우린 참 오랫동안 일해왔지만, 그랬던것 같다.
쌍방의 대화는 항상 통한적이 없고,
그 사람이 뭔가를 얘기할때, 내가 참 잘 들어줬던것 같다.
그건 대화는 아니었다.
나는 상대가 누구든, 사람의 얘기를 잘 듣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얘기해주는 장점을 지녔다.
그 사람과 나와의 특별한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그렇다. 우린 한번도 대화가 잘 통한적이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의 빨간펜을 이해하고 있었다.
지적질을 하고 싶은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의견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 나은 서비스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부분임을 나는 안다.
난 그저 의견을 내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더 나은 대화법에 대해.
의도가 어찌 되었든. 또한 그 의도가 좋고 나쁜것인지를 서로가 판단할 수 있다고 해도
일이란 것은 둘만의 관계에 의해 굴러가지 않는다. 그 관계 외 다른 많은 관계와 얽힐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이해하고 인정하는 사회의 예의와 관습 안에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