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 아지랭이
나는 외할머니댁을 가지 않는다. 외삼촌과 이모 댁을 가지 않는다. 함께 자란 순이는 마치 친정 가듯, 그곳을 다녀가곤 한다. 사랑받은 아이와 사랑받지 못한 아이. 그럴까?
나는 그곳을 초등학교 3학년에 떠났다.
외삼촌이 장가를 가야 했는데, 시집오려고 한 외숙모가 아이들이 너무 많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그곳을 떠나 부산의 엄마 품으로 가게 되었다. 순이는 남고 우리는 떠난다. 친손주는 남고, 외손주는 떠난다.
그 사건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게 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시골에서 있었던 일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몇 가지 단편만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서글픈 기억들이다.
순이는 할머니와 큰방에서 함께 잤다. 할머니 팔베개를 하고 잤다. 나는 중간방에서 언니와 필구 삼촌과 함께 잤다. 순이는 가끔 우리와 함께 자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필구 삼촌의 팔베개를 하고 잤다. 난 항상 언니품에서, 언니의 팔베개를 하고 잤다.할머니가 나를 한 번도 품지 않은 것인지, 내가 할머니 품을 한 번도 찾지 않은 것인지, 그것은 모르겠다. 언니에게 언제부터 나를 품고 잤느냐고 물어본 적이 없다. 물어본들, 언니라고 기억할까...내게 할머니는 순이의 할머니였고, 내가 그 시골집에서 의지한 사람은 오직 언니 한 사람밖에 없었다.
순이와 나는 동갑이다. 나는 1월생이고 순이는 8월생이다. 순이는 항상 내 이름을 불렀는데, 내가 순이보다 학교를 먼저 들어가면서 나를 '엉가'라고 부르게 되었다.순이는 얼마 전까지도 내가 자기보다 한 살 많은 줄 알았단다.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단다.
순이는 나보다 키와 덩치가 컸다. 나는 작고 마른 아이였다. 언니는 시골 초등학교의 전교생이 다 모여도 단 번에 찾아낼 수 있을 만큼, 하얗고 예뻤다. 장구 삼촌은 그런 언니를 '뽄쟁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크면 미스코리아 나가라고 했다.
나는 '백 여시'였다. 장구 삼촌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면 '저 백 여시 봐라~' 라며 나를 놀렸다. 나를 아주 많이 예뻐하고 귀여워해 준 장구 삼촌. 내 어린 시절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들은 모두 장구 삼촌과 함께 였다.
비가 그친 날이면 마당에서 나를 하늘로 뛰어 올려 주기도 했고, 밥을 먹을 때면 '저기 봐라~'라며 나를 한눈팔게 한 뒤 내 밥그릇을 감추기 일쑤였다. 꽤 자주 넌 주워 온 아이니 아랫방에 세든 새댁에게 가서 살라며 놀려먹기도 했다. 나를 참 많이 예뻐해 준 유일한 사람. 외가댁 식구 중에 유일하게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사람.
외할머니댁 옆집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담장밖에 떨어진 감을 우린 자주 주어다 먹었다. 그 집 감은 항상 달고 맛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옆집에 가서 떨어진 감을 주워 오는 일은 대부분 순이가 했었지만, 어느 날은 내가 일찍 일어나 다녀온 기억이 있다. 그날은 그런 나를 할머니가 칭찬해주길 바랬던 것 같다.
슬프게도 할머니가 내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해 준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그게 사실일까, 아니면 내 기억이 적절하게 걷어낸 것일까. 아마도 할머니는 우리에게 사랑을 하나하나 표현할 순 없었을 것이다. 손주 넷을 거둬 먹이는 일만 해도 참 고단하고 팍팍한 삶이 아니던가. 그 팔자도 좋은 팔자라 할 순 없겠다.
나는 꽤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했다. 방을 쓸고 닦는 일. 마루를 닦는 일. 비료부대를 어깨에 메고 뒷산에 가서 나무(소나무 잎, 솔)를 해오는 일. 빨래를 걷는 일. 감자를 씻고 깎는 일. 설거지를 하는 일. 가마솥을 씻는 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내 기억의 모든 곳에서 우리는 집안일을 했다. 난 그것이 슬프지 않았고, 힘들지 않았다. 구박받거나 학대받는다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다 큰 우리를 볼 때마다 울었고, 내가 그 어린것들한테 일을 시켰다며, 너희를 볼 면목이 없다고 했다. 연세가 들어갈수록 후회만 남으시나 보다. 할머니의 그런 행동들이 반복되면서, 우리가 꽤 불행하게 컸음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