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소녀가 소년을 만났을 때

그가 앉아있다. 순간, 내 기억 속의 소년은 사라지고, 흡사 젊은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중년 남자가 나를 반겼다.

“안녕?”하면서 세월의 흐름을 순식간에 실감한 시간이었다.

강남의 맛 집이었다. 불판에는 차돌박이가 구워지고, 식당 직원이 오더니, 내 앞 접시에, 명이 나물을 곁들여서 놔준다.

“먹어봐, 이 집 메뉴야.”

20년 전, 여의도의 국수 전골 집에서 국수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구분 못한 채 엉겁결에 삼키듯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 꼭 20년 만이다.

20년 후의 그와 나는, 서른 살의 우리와는 또 달랐다.

방송일 한답시고 결혼은 뒷전, 좌충우돌하는 방송 작가 5년 차인 나와, 대학원까지 나오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고, 낼모레면 결혼한다는 그.

그때까지만 해도 철부지였던 나는 차분한 그 앞에서 주눅이 들었었다.

차분한 그도, 약간 흥분된 어조로 며칠 후면 결혼을 한다면서 지갑 속에 있는 아내 될 사람의 사진을 보여줬다. 흘깃 봤는데도, 카리스마가 있는 얼굴이었다.


20년 전의 만남에서 친구는 “왜 이제 나타난 거야?”라고 했다.

내가 뭐라고 답해줘야 했을까? “그러는 너는? 그렇게 내가 좋다고 해놓고, 왜 한 번도 날 먼저 찾아볼 생각은 안 했던 거니? 같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같은 여의도에서 일을 했는데, 왜 이제야 연락이 닿은 거니?”라고 했어야 했나? 이제 와서 왜, 그냥 다 추억으로 남았을 뿐인데 어쩌라고? …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는 한창 예민한 시기의 사춘기 소년일 때, 자신은 전 세계를 떠돌며 시를 쓰는 김삿갓처럼 될 것이며, 언제나 나를 지켜줄 거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도 친구가 너무 진지해서 나는 살짝 두려웠다.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진짜 이루어질 것 같아 지켜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절절히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왠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세월은 다시 강산이 두 번 변했고, 나는 독신으로 남았다. 그 친구는 그때 결혼한 아내와 여유롭게 잘 살고 있는 듯 보였다. 시인은 못되었지만, 경영학 박사님에,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명망 높은 전문가로 살고 있다.

“애들은?”

“으음. 애는 없어…”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 “그랬구나. 결혼한 지 꽤 됐으니, 아이가 있다면 많이 컸을 것 같아 물어본 거야. 미안, 둘이 너무 금슬이 좋아 그런가 보다.”

라고 수습하느라고 했다.

그가 자녀가 없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안됐고, 한편으로는 안심도 됐다. 왠지 나도 혼자인데, 그가 아이까지 있다면 더 서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못됐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다니… 하면서 나의 마음은 오락가락했다.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중․고교 시절, 백일장에 나가면 서로 학교 대표로 만나던 사이다. 어렸지만, 우리는 문학소녀, 소년이었고 세상의 고민은 다 짊어진 채, 고뇌하며 인생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던 것도 같다.

이제는 누가 봐도 무서울 것 없는 중년의 아줌마와 아저씨로 만난 우리. 우리가 만난 식당은 강남의 한 복판, 직장인이 많이 찾는 맛 집이었고, 주변은 떠들썩했지만, 그의 존재만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온 마음을 다해 들어주고 있는 듯했다.


그가 술을 좀 한다면 2차로 맥줏집에 갈까 했는데, 술을 즐겨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반주로 맥주 한 잔만 하고, 어디 조용한 찻집으로 가기로 했다.

찻집에는 마침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거기서 좀 더 얘기를 나누었다. 그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일,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나는 그냥 생각나는 이야기를 툭툭 뱉었다. 서로의 가족관계와 소식을 알고 있는 동창 친구들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우리가 서로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것과, 지금 그는 직장인으로, 나는 방송작가로 사는 거 이외에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우리가 한때 서로를 호감의 눈길로 그저 바라봤을 뿐, 이성친구로 가까울 듯 말 듯 편지를 몇 번 교환한 게 다였다.

초등학교 동창으로 만나, 청소년기에 보고, 그 후 서른, 그리고 다시 20년이 흘러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만나고 있는 것이다.

순간, 우리의 다음 만남은 언제가 될까 싶어 마음 한구석이 스산해졌다.

지금은 맘만 먹으면 ‘동창 찾기’는 식은 죽 먹기다. 서로 안부를 전하며 가끔 볼 수도 있는 사이인데 그냥 그렇게 자주 보지는 않으면서 아주 잊어먹지는 않는 그런 사이. 우리의 인연이 어쩌면 묘하다도 싶다.

우리는 같이 전철을 타고 오다가, 그가 내려야 할 역에 닿자,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잘 가, 만나서 반가웠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함께 있었던 시간이 반갑고 충만했는데, 뭔가가 아쉽다. 지나온 세월이 야속하기도 하다.


20년 전에 그는 “너는 왜 나를 이제 찾았어?” 라더니, 이제는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었다. 계절은 가을이고, 나는 몸살을 앓았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후회되는 것도 좀 있다. 더 마음이 가는 친구를 챙겨서 보지 못했다는 것, 나를 좋아해 준 친구를 잊어먹고살았다는 것. 나의 일에만 몰두한다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오지도 못했고, 과연 여태껏 살아온 나의 인생이, 이게 최선이었을까도 싶다.

가지 못한 길을 아쉬워하는 그런 심정일까?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잘 살아온 것은 같은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할까?


그는 아주 오래전에 나를 ‘첫사랑’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감정도 아니었는데, 왠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진다.

문득, 우리의 만남이 징검다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자기의 길을 걷고 있다가 한 번쯤은 꼭 봐야 할 것 같은 친구를 찾아보는 그런 이벤트.

인생이라는 여정에서의 쉼표, 우여곡절 많은 인생길에 꼭 거쳐 가야 할 것 같은 만남, 그리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관계… 로 우리는 남았다.

다시 힘을 내어본다. 앞으로의 시간은 더욱 쏜살같이 흘러갈 것이다. 이제, 우리의 만남이 언제가 돼도 나는 좋다. 그저 너는 너의 자리에서, 나의 행복을 빌어 줄 거니까. 나 역시 그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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