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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Feb 24. 2020

배터리

나는 배터리 30% 이하를 용납해본 적이 없다. 깐깐한 주인 덕분에 내 스마트폰은 배터리 잔량을 표시하는 정수부를 단지 31부터 100까지만 운용하면 될 뿐인 존재가 되었다. 스마트폰은 연신 감사함을 표했다. 넉넉지 못 한 배터리는 전자제품을 크게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단순한 프로세스조차 망설이게 되고, 그 망설임이 쓸데없는 디스플레이를 낳아 오히려 배터리를 더 잡아먹는 등. 그러나 본인이 무언가를 하더라도 다른 일을 추가적으로 할 에너지가 충분하다면 걱정없이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 걱정만큼 소모적인 것도 없어요, 갤럭시 S8은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다소 억울해졌다. 스마트폰이 100%의 배터리로 평생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자주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고, 고속충전으로 공급의 효율성은 나날이 증대되어 왔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쓰는 것은 에너지요 받는 것은 나이듦이니 일평생 걱정에서 벗어날 길이 있나? 자명한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쁠 수가 있나? 늦출 수만 있을 뿐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주인으로서 강력 항의했다. 너는 감히 반인간적 존재라고.


그는 동의의 의미인 듯 빨간불을 내보였다. 그래, 나는 30% 아래로 내려가본 적이 없으니까. 시스템상 바닥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아는 것도 없을 수밖에. 그러나 당신은? 늙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지? 아프고,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살아온 세월과 질병, 사망의 가능성이 비례하는 건 얼마 정도 맞는 말이야. 그러나 사람은 당장 삶을 마칠 수도 있어. 역병, 사고, 자포자기, 외로움, 꿈을 잃음 등의 모습으로. 그런 면에서 누군가는 이미 죽었거나, 심지어 몇 차례 죽었는데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들을 살린 에너지는 어디에서 올까? 밥을 잘 먹어서? 현대의학으로 만들어낸 고속충전?


주효한 에너지는 오로지 죽음뿐, 그가 말한다.


끝을 두려워하든 두려워하지 않든 유한한 덕분에 모든 것이 의미 있다. 내 손을 거쳐가는 물건은 하물며 몸뚱아리의 세포, 만나는 인연, 꾸게 될 꿈까지. 영원하리라 방심할 때 생명력을 잃는다. 잃고 싶지 않아, 혹은 잃을 것을 알기에 순간에 더욱 열중한다. 그런 면에서 100%와 30%는 동등하다. 내가 지금 몇 %인지 알지 못 한다는 점에서 한 번 동등하고, 그 순간이 매우 짧다는 점에서 두 번 동등하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세 번 동등하다. 매 순간이 오직 유일하다면 산다는 건 대단히 특이한 일이다.


죽음이 지지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뿐, 내가 말한다.


어느새 스마트폰은 충전을 마치고 파란불을 점등하고 있다. 일련의 과정으로 몸이 뜨거워진 그를 한 손으로 들어본다. 완충이 이렇게나 빨리 되는 거였나? 아, 날짜가 바뀌었기 때문인가.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데 100%만한 게 없으니까. S8이 여전히 꽤 쓸만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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