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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Apr 18. 2020

잘도 숨어 있더라

실수로 이메일 수신 동의를 미처 빼먹지 못 한 사이트에서의 광고나, 온갖 제목없음 혹은 다양한 도형으로 도배된 스팸으로 가득한 메일함을 그래도 한 번씩은 비우기 위해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메일은 전자통신의 선두주자라지만 일찍 태어난 만큼 많이 늙었고, 남들의 SNS 프로필은 찾기 쉬워도 이메일 주소는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메일로는 어떠한 감동도 동요도 느끼기 어려웠다. 그런데 광고, 스팸, 주문확인서... 등등을 기계적으로 체크하고 "읽음 표시"를 클릭하려 한 순간, 한 메일이 눈에 띄었다. 한 사이트의 포인트 소멸 예정 안내 메일이었다.


내가 이런 사이트에 가입한 적이 있었나, 싶어 들어가보았다. 사진 인화 서비스. 장당 110원. 3% 포인트 적립. 생각나고 말았다. 우리의 때 지난 기념일. 편지 곳곳에 붙이기 위해 지난 천 일 간 함께 찍어온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열 장 남짓을 장고 끝에 골랐고, 편지에 붙이기만은 아까워 각각 두 장씩 주문해 하나씩은 내가 소장했더랬다. 이후로 그 사이트를 이용한 적은 없었다. 다음 기념일이 돌아오기 전 우리는 헤어졌으니까. 서로의 추억을 처분하고, 감정을 지우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만 내가 이 일에 성공했는지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공교롭게도 포인트의 사용 기간은 정확히 1년이었고, 작년의 날짜에 맞춰 알림을 보내왔다. 얼마 되지도 않는 이백 몇 십 원뿐이었지만 곧 사라질 예정이니 쓰시는 게 좋겠다고 친절히도 알려온 것이다. 그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하고 싶으면서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모든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고, 포인트가 주인을 잘못 만나 쓰일 곳 없이 생을 마감하게 생겼으니, 한없이 미안한, 앞으로도 미안할 감정만 가슴 깊이 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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