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기와 자유의지 문제
테드 창, <우리가 해야 할 일>의 문제제기를 중심으로
1. 문제점
세계적인 SF 소설 작가 테드 창은 본인의 저작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 "예측기"를 소개한다. 예측기는 자동차 문을 열 때 사용하는 리모컨처럼 생긴 조그만 장치인데, 버튼을 누르면 LED가 반짝인다. 정확히 말하면, 버튼을 누르기 1초 전에만 불빛이 반짝인다. 그런데 이를 거스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해서, 버튼을 누르지도 않을 요량으로 누르는 척을 한다든가 1초가 채 지나기 전 버튼을 누르려 하는 식으로 예측기를 속이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테드 창은 예측기의 존재가 변경 불가능한 미래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불빛이 반짝이는 것은 정확히 1초 후 본인이 버튼을 누를 것임을, 달리 말해 누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지의 부존재를 확인하고 움직임의 욕구를 잃어버리는 무동무언증에 빠지고 만다. 소설의 세계는 자유의지를 상실한(상실하였음을 확인한) 디스토피아다.
그러나 정말로 예측기의 존재가 자유의지의 부존재를 의미하는지 이에 대한 다툼이 있다. 몇몇 이론을 소개한다.
2. 견해의 대립
(1) 단순 인과관계 역전설
단순 인과관계 역전설에서는 단순히 원인과 결과가 역전된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의 설명에 따르면, 예측기는 "네거티브 타임 딜레이 회로"를 중추로 한다. 이는 과거로 신호를 보내 LED를 점등시키는 것인데, 역전설에서는 이 원리에 주목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원인) 어떠한 상태는 반드시 실현될 수밖에 없다(결과). 예측기가 없는 상태라면 원인이 결과를 낳는 식으로 사건이 전개될 것이지만, 반대로 예측기는 이 관계를 역전시켜 시간상 결과를 원인 앞으로 가져온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원인을 선택하는데 그에 따른 결과가 먼저 나타났다 하더라도 원인 선택의 자유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측기라는 시간의 틈으로 그 결과를 엿보았을 뿐이다. 약간 논점이 빗겨가지만, 눈을 감는 등 LED에 불이 들어오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버튼을 누른다면 그 관계가 역전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2) 제한적 자유의지 부정설
한편, 자유의지가 제한적인 시간 동안만 부재한다는 이론도 제시된다. 위의 역전설에서는 단선적인 시간론을 전제로 원인과 결과를 직선적인 관계로 파악해 시간선 자체의 선택은 배제하고 있다. 진정한 선택이라 함은 원인-결과의 순서쌍이 무수히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선 중 원하는 것을 언제나 실현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버튼을 누르기 1초 전 반드시 예측기가 점등하게 된다면, 그 1초 간은 절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이는 예측기를 눌러야만 하는 구속력이 발생한다는 뜻이며, 이 구속력이야말로 자유의지의 부존재를 증명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일생의 자유의지 전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불빛이 반짝이고 버튼을 눌러야만 하는 1초 사이에만 자유의지가 부재한다. 설령 자유의지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예측기와 같은 수단으로 그 부존재를 목격할 수 없다면 자유의지의 존부에 관해 논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 따라서 추후에 수많은 예측기가 개발되어 우리의 매 1초마다의 모든 선택에 예측기가 불을 밝힐 수 있다면 자유의지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 역시 이론상 가능하다. 이 점을 들어 제한적 자유의지 부정설은 잠정적으로 전부 자유의지 부정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3. 검토
두 이론은 결국 자유의지의 범위에 따라 예측기의 의미를 달리 보고 있다고 해석된다. 단순 인과관계 역전설에서는 원인-결과의 일대일관계에는 애초에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 없다고 보는 반면, 제한적 자유의지 부정설은 그마저도 왜곡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의지라고 지적한다. 자유의지에 대한 정의마저 합의를 보기 어려운 와중에 그 존부를 확인하는 이론적 전개에 한계가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결과가 유동적이든 결정론적이든 삶은 본디 탄생이라는 원인과 죽음이라는 결과 사이의 무엇임에는 변함이 없다. 동 작가의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 언급되었듯, 삶이란 신이 들려주는 이야기이고 우리는 등장인물이자 관객으로서 그 교훈을 얻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자유의지의 부존재가 삶의 무의미함과 같다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