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설
듣는 이를 배려하기 위한 표현인지 "있다", "없다"는 단정적인 표현보다 "있다고 할 수 있다", "없다고 할 수 있다"는 식의 돌려 말하는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 문제는 이런 표현이 특정한 맥락 속에서는 그 의미가 명확해지는 반면, 어구만 분리하여 놓고 보았을 때에는 무슨 의미를 갖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예시로 든 것과 같은 표현의 본질적 의미를 알아보는 데 있다. 이 분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표현이 등장한다.
있다고 할 수 없다
없다고 할 수 있다
있다고 할 수 있다
없다고 할 수 없다
읽을 때 대단히 헷갈릴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2. 분석
(1) 부족하게 존재할 때
논의를 위하여 다음의 사례를 가정하자. 당신은 돈을 갖고 있다. 하지만 넉넉하지는 않아서 돈이 없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에게는 돈이 있는가?" 당신은 다음 문장 중 하나로 대답한다.
① "나에게 돈이 있다고 할 수 없다."
② "나에게 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③ "나에게 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④ "나에게 돈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놀랍게도, 네 문장 모두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있다고 할 수 없다"부터 "없다고 할 수 없다"까지 의미상 배타적인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네 대답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다르다. ①과 ②의 경우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충분하지 않아 없는 것과 다름 없다는 뜻이다. 반면, ③과 ④의 경우에는 나에게 돈이 있기는 있으므로 그 사실을 서술하는 발언에 가깝다. 즉, 네 가지 대답은 ①과 ②, ③과 ④의 묶음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전자는 유의미성 차원, 후자는 존재성 차원에서 검토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③과 ④를 "있다"로 해석하더라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2) 존재하지 않을 때
한편, 돈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가정하자. 위의 사례와 같이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에게는 돈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① "나에게 돈이 있다고 할 수 없다."
② "나에게 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③ "나에게 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④ "나에게 돈이 없다고 할 수 없다."
(1)과는 달리, ①과 ②만이 대답으로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대답은 유의미성 차원이 아닌 존재성 차원에서의 대답으로, ①과 ② 모두 "없다"는 뜻을 갖고 있다. 유의미성은 애초에 존재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존재성이 결여된다면 유의미성에 대한 문제 자체가 제기될 수 없다. 사례의 경우, 돈이 하나도 없다면(존재성 결여) 갖고 있는 돈이 넉넉한지의 여부는 애초에 논의될 수 없는 것이다(유의미성 논의 불가). 따라서 논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의미성에 대한 논의는 존재성에 대한 논의로 수축하여 수렴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충분하게 존재할 때
마지막으로, 돈이 많아 넉넉한 상태를 생각해보자. "당신에게는 돈이 있는가?"
① "나에게 돈이 있다고 할 수 없다."
② "나에게 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③ "나에게 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④ "나에게 돈이 없다고 할 수 없다."
(2)와는 달리, ③과 ④만이 대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답은 (1)에서의 존재성 차원에 그치지 않고 유의미성 차원까지 두루 포함하고 있다. 나에게 돈이 분명히 존재하며(존재성 충족) 그 돈이 넉넉하다(유의미성 긍정)는 의미에서 있다고 할 수 있고 또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대상이 충분히 존재할 때 유의미성 차원의 논의는 존재성 차원의 논의에 흡수되어 소멸한다고 볼 수 있다.
3. 결론
위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1) "있다고 할 수 없다"와 "없다고 할 수 있다"는 유의미성 차원의 발언이며, "있다고 할 수 있다"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존재성 차원의 발언이다.
(2) 언급 대상이 존재는 하는데 충분하지 않을 경우 네 문장 모두 참이 될 수 있고 그 성질은 (1)과 같다.
(3) 언급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유의미성 차원은 존재성 차원으로 수축하여 수렴한다.
(4) 언급 대상이 존재하고 충분할 경우 유의미성 차원은 존재성 차원으로 흡수되어 소멸한다.
(3)과 (4)의 구분에 주의하기 바란다. (3)의 경우 유의미성은 존재성을 전제로 성립하기 때문에 존재성이 결여된다면 유의미성은 0으로 수축하여 존재성 차원으로 수렴한다. 반면 (4)의 경우 존재성의 비대함으로 인해 유의미성 논의가 그에 흡수되어 외견만 사라졌을 뿐, 존재성 차원 안에 여전히 존속한다.
4. 실례
출처: 김케장 지금은 "케장콘"으로 유명한 김케장의 한 만화에 나온 위 발언을 분석해보자. "있었는데요"는 존재성에 관한 논의로, "있다고 할 수 있다"에 대응된다. 이어지는 "없었습니다"는 유의미성에 관한 논의로, "있다고 할 수 없다"에 대응된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위 이미지는 발언자의 주관적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존재성에 대한 강한 불만 정도로 평가된다. 이 글에서는 2.의 (1)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