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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Jul 11. 2020

나는 분명 경적 소리를 들었는데

나는 분명 경적 소리를 들었는데 자동차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이렇게 주위를 둘러보는 와중에도 빵빵 울리는 소리가 났기에 필경 이것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안일한 백일몽에서 깨어난 것은 내가 이어폰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재생한 파일에는 온갖 소음이 함께 녹음되어 있었다. 나는 깜빡 속았다.


이것은 억울해할 만한 일이다. 같은 상황에서 예컨대 모기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자.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모기를 쫓아내기 위해 방방 뛰어다녔을 것인데,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봄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모기가 끊임없이 나를 맴돈다는 사실은 삶에 회의감을 느끼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치명성을 말하자면 여러 명을 죽이고도 몇을 더 빈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아 망정이었지, 조금이라도 다른 소리가 나왔다면 어제가 내 기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감사하다.


그런데, 실제로 자동차가 지나갔다고 가정하면 상황이 묘해진다. 짧은 순간 나는 지나가는 자동차가 경적을 울렸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고 가던 길을 속행하였을 것이다. 지금이야 당시의 시각과 청각의 불일치 덕분에 부조화의 근원을 틀림없이 알고 있지만, 현상의 인과관계가 일치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의구심을 가졌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즉, 거짓을 사실이라 여겼을 것이 뻔하다. 이 사실에 심한 공포감을 느낀다.


사람이 일생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보는 것, 듣는 것 따위의 일차적인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마저 무지를 이유로 부인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이끌어낸 데카르트나, 제한된 상황에서 중력과 관성을 구별할 수 없다(이른바 "등가원리")는 아인슈타인이나 둘 다 대단하다는 의미로 미친 사람들이다. 그러나 범인이 이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순간 이곳이 사실은 우주 한복판인데 엘리베이터가 등가속운동을 하는 바람에 아래로 힘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 중력이 작용한 결과는 아니다라는 사실을 무슨 수로 도출해낸다는 말인가? 앞에 지나가는 차 경적을 울리는지 얌전히 지나가는지도 그 구분이 온전치 못 할 판인데?눈앞의 사실에 대한 판단마저 그르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진리를 탐구하고 알아내고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실이란 우리 상상 이상 다차원에 속하는 것이라서 모든 것이 사실이고 동시에 거짓일 수 있다 본다. 자동차가 지나가며 경적을 울리고 그와 동시에 이어폰에서 경적이 들리는 상황과, 자동차는 조용히 지나가는데 쓸데없이 이어폰에서 경적이 울리는 상황을 겉모습로는 절대 구분할 수 없다. 현상의 외견이 곧바로 사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사실을 포함하고 있음은 확실하고, 구분할 수 없다면 둘 다 사실로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를 일차원적인 현상으로서의 "사실"과 구별되는 인지 대상으로서의 "진실"이라 명명하고 싶은데, 이름은 크게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실체를 전혀 알 수 없든 명백하게 알 수 있든 무언가에 대하여 함부로 단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픈 마인드, 열린 마음 등등이 오늘날의 시대정신이기도 하고.


닫힌 마음을 가지고 함부로 공포에 시달리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만사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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