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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Jul 21. 2020

어제는 눈이 왔다

비가 잔뜩 온다길래 지레 겁먹고 몸뚱아리만한 우산을 들고 갔더니, 중부지방에는 오늘 저녁부터 비가 오겠습니다가 민망할 정도의 비가, 오고 있었다고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닌데 맞는 말은 더더욱 아닌 느낌으로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는 사람보다 쓰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는데, 우산을 쓴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 비가 오고 있었어? 나도 써야지가 아니라 쟤는 왜 이 정도 비 갖고 호들갑이야하는 수준이었기에,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우산을 차곡차곡 접었다. 이러한 광경을 또 들킨다면, 거 봐라 비도 안 오는데 괜히 썼다가 눈치 보여서 접어드는 꼴이 강단조차 없어보여서 큰 인물은 못 되시겠다고 말할 것 같아서, 앞뒤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 때 후다닥 해치운 것이다. 남의 시선에 쉽게 얽매이는 사람은 도통 사는 게 쉽지가 않다. 다행히 늦은 밤이라 인적은 드물었다.


그러나 우산을 접는 게 마냥 나쁜 일은 아니었던 것이, 반팔 반바지였음에도 불구 맨몸으로는 도저히 비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뿐더러, 오직 그의 존재는 가로등이나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유심히 바라보았을 때 흩날리는 무언가로서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뿌옇고 공기는 답답하며 바닥이 스멀스멀 젖어가기 시작했으니 분명 비일 터였으나, 눈에 보이는 정황증거만으로는 내 촉감과의 부조화를 해결할 길이 만무하여, 잠깐은 멀미를 느끼기도 하였다. 다시 한 번, 사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오롯이 믿음으로 승화하여야겠다는 다짐으로, 가던 길 가만히 멈추어서서 가로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가벼운 모양인지, 비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리저리 움직이기는 하는데, 그 수를 빠짐없이 셀 수 있을 정도로 개수가 적어서 한 번 놀라고, 바람이 양껏 부는 것 같지도 않은데 육지로 착륙하고자 하는 그의 여정이 너무나도 고돼보여서 두 번 놀랐다. 비가 바람 때문에 빗금처럼 수직 아닌 각도로 내리는 것은 본 적 있으나 직선에서 벗어나 차라리 자유유영에 가까운 자취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혼란은 가중되었다.


저것을 비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는 없고, 인생 경험 또한 길지 않아 비라고 단정 짓기에는 일단 무리였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득 저것은 가루눈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루눈은 바람이 많이 부는 때 만들어지는데, 함박눈이나 싸락눈에 비해 크기가 작아 쉽게 흩날릴 뿐만 아니라, 쌓이기도 쉽지 않아 바닥이 온통 물바다가 된다. 그렇다. 7월이라는 사실 하나만 무시한다면, 비가 아닌 가루눈이 오는 중이라고 간주하였을 때 나의 경험과 일반상식에 부합한다. 지구가 엉망진창이고 각종 자연재해가 세계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와중에 한반도에 느닷없이 눈이 내렸다 한들 맥락에 크게 어긋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구가 많이 아팠구나, 반성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무더운 7월 아닌 밤중에 첫눈이라니. 속이고 싶었겠지만 나에게만은 감출 수 없었다. 꽤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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