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
얌전히 누워 있다가 화들짝 일어났다. 무언가 허한 느낌이 든다. 혀가 짧아진 느낌, 아랫니가 휑한 느낌, 목젖이 충분히 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에? 에? 에?"
연음을 기어코 활용해보려 한다. 하지만 초성은 견고하다. 절망 끝에 깨닫는다.
"바치이 어어져다."
받침이 없어졌다.
2.
"아녀하세요."
인사조차 쉽지 않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항상 어렵지만 이만큼 어려울 수가 없다. 대체재를 찾아본다.
"바가스니다."
차라리 일본어를 하는 게 나을 지경이다. 그러나 일본어를 모른다.
"어서오세요."
장사는 해도 되겠다 싶다. 그러나 사장도 종업원도 아니다.
3.
받침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든 쓰지 않으면 퇴화되기 마련이다. 단단한 기계마저도 물과 산소와 세월에 취약하다. 사람은 더욱 그렇다. 주어진 에너지를 온갖 곳에 함부로 쓸 수 없는 이상 몇 가지는 긴축해야 한다. 예컨대 글을 본다면 말을 줄이면 되고 말을 하려면 글을 줄이면 된다. 양자의 줄다리기를 허용하는 시기가 있고 한쪽이 일방적인 시기도 있으며 한참 늙으면 줄 자체가 끊어질 것이다. 말글은 하나 같아도 어째 나뉘는 일이 잦았던 듯하다.
그렇다면 글에 에너지를 쏟기 위해 최소한의 말조차 깎아다 쓰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그중에서도 초성과 중성이 없으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으니, 말이라는 구색은 유지하면서 적당히 갉아먹기 위해 없어도 말이 아니지는 않은 종성이 후보로서 가장 유력했을 터이다. 이것은 꽤나 합리적이다. 종성에서도 자음의 충분한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4.
"기바 하 주이요."
간단히 먹기로는 김밥이 최고였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각오가 서지 않는다.
"수대구 하나요."
순댓국이 대구가 된다. 문제는 그 집이 대구도 판다는 것이다.
"부대찌개 하나요..."
혼자 먹을 양을 팔기는 하나.
5.
돌아갈 수 있을까.
당장 글을 줄이는 것은 어렵다. 앞으로도 몇 차례 어려울 것이다. 이번 기회로써 종성을 마구 가져다 쓸 수 있음을 배운 언어중추가 허락도 없이 내 말을 철거시키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말은 글 이상으로 중요하다. 양껏 조잘대거나 호탕하게 웃거나 간질이듯 속삭이는 것을 주요한 즐거움으로 삼아온 몸이다. 말이 실시간으로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역으로 글을 붕괴시킬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떤 글이든 쓸어담아서 만 개 말에 갖다 붙이는 것이다. 말은 더 길어지고 쓸데없는 말이 종종 섞일 것이다. 받침 있는 말을 활용하기 위해 어려운 말을 티피오도 없이 소환할 것이다. 그러나 말도 과유불급이다. 침묵이 금이라는 말을 매사 침묵만 하라는 뜻이 아니라 불필요한 말 좀 줄이고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말도 최적량이 있을 것이다.
결국 해법은 말을 섞는 것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것이다. 괜찮은 단어를 차용해 내 맘대로 조합해보고, 때로는 억양마저 내 뉘앙스풍으로 변형시킨다. 양을 조절하는 법 또한 그로써 터득한다. 들어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때에도 그랬다. 받침의 실종은 의외로 어떤 알람 내지는 경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6.
"안녕하세요."
다행히 누군가 인사를 해주었다. ㄴ과 ㅇ을 되찾았다.
"안녕하세요."
대화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