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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Aug 14. 2021

여름 싫어

    몇십 년째 맞는 여름이건만 이 계절은 항상 나에게 생소하다. 어디에 담아두었는지 모르는 땀을 한바가지 쏟아내게 하고 이제 더 없지 않겠냐는 생각을 비웃듯 온몸에 걸쳐 불순물의 희생양이 된다. 체중이 문제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군복무 시절 난생처음 다이어트를 감행하기도 하였으나 작아진 몸에서 땀은 곱절로 생성되었으니 이 신체는 일반상식마저 뒤엎는 것이었다. 노잣돈보다도 나를 훤히 따라올 놈일지도 모르겠다.


    생리적인 불쾌함이 뒤따르는 이상 여름을 좋아할 수 없었고 여름에 무엇을 하는 것은 더더욱 좋아할 수 없었다. 여름은 많은 것이 생동하는 시기이나 나는 움츠러드는 것이 좋았고 필요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여름잠을 구가하고 싶었다. 다행히 지금은 열심히 빈둥거리는 중이지만 그 전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그것을 되사는 것만큼이나 끈적하고 고온다습한 일이다. 결심컨대 집에서 가까운 독서실을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은 오로지 여름의 덕분인 것이다.


    몸의 불편함은 그저 내색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의 내면뿐만 아니라 외견까지 뒤트는 가장 큰 문제는 땀이 상하의의 변색으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옷들은 채도가 제각각이라 물에 젖으면 색이 흐리멍텅해지며 젖었음을 분명히 알리는 쓸데없는 기능을 갖고 있다. 예컨대, 본인이 좋아하는 회색의 경우 물에 한껏 젖고 나면 검정색으로 물들어버린다. 더욱 문제인 것은 땀이 온 옷에 고르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서 신경써서 몸에 밀착시키지 않는 한 부분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즉 점박이이다. 몸의 특정 부위를 따라 불규칙하게 나열된 방울방울을 유행하는 패션이라 생각할 행인은 아무도 없다. 우와, 피하고 싶어, 얼마나 살쪘길래 저래 등등. 여름은 자주 부끄러운 계절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 오랜만의 외출로 함부로 들뜬 마음에 땀에 젖을 것이 뻔한 옷을 입고 나갔는데, 글쎄 난데없이 천둥구름이 끼고 장대비의 폭격을 당했더랬다. 마침 땀을 뻘뻘 흘리며 귀가하는 길이었고 거리도 얼마 남지 않아 서두르면 금방 피할 수 있을 터였다. 일기예보도 마땅치 않았는데 우산을 쓰고 오순도순 걸어가는 이들을 보며 비참한 척하기 좋은 날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비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내리치는 빗방울은 나의 상의에 흔적을 남겼고 차례차례 누적되면서 내 고유의 수분과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좋은 카무플라주였고, 여름이 나에게 남긴 여러 안타까운 경험을 씻어내는 선물이었다. 나는 가는 걸음을 늦추고 기쁜 마음으로 빗방울들을 받아들였다. 집에 도착하여 확인한 상의는 가히 드리핑이라 해도 좋을 예술작품이었다. 천천히 넘어가는 8월의 좋은 기억은 여름을 싫어할 것이 없으며 예기치 못한 위기가 때론 전화위복이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안겨주었다.


    남은 여름도 즐겁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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