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저녁, 선풍기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선풍기로 손을 뻗었다. 정지 버튼을 누르려는데 여느 때처럼 이상한 생각이 돋아서 선풍기 몸통을 돌렸다. 선풍기는 이제 나 대신 창문을 향해 프로펠러를 돌렸고, 바야흐로 선풍기 대 자연의 서막이 오른 것이었다.
당장 든 생각은 자연히 자연이 이길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선풍기 바람이 시원하단들 내 방에서나 지배자일 뿐이다. 반면 자연은 지축을 뒤흔들 정도니 전기가 애써봤자 콧방귀에도 미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선풍기는 돈만 낸다면 언제 어디서든 바람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라서, 자전과 공전과 달과 해의 우연에 의존하는 자연과는 또 달랐다. 만약 자연이 바람을 만들어내지 못 할 적에 선풍기가 전력원을 찾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둘의 우위는 쉽게 가릴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창과 선풍기 사이에 가만히 서서 등과 배를 바람으로 적시면 그만이다. 두 바람은 나를 골고루 버무려주었고 나는 여름인 것도 잊고 피부를 뾰족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