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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Fantasia

더위 팔기

by ggom

돌이킬 수 없는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지구는 나날이 더워졌고 사람들은 평생 살 것도 아닌데 미시적 관점에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하자고 합의했다. 달리 말해 온난화 잡기를 포기하고 당장 시원하게 에어컨이나 틀자고 리모콘을 들었다는 것이다. 다같이 안 틀면 조금이라도 기후변화를 늦출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인내에 능하지 않다. 이 모든 꼬라지의 주범이 인간이니까 말 그대로 "죄수"의 딜레마인 셈이다.


하여간 사람들이 더운 날씨에 실외기까지 맘껏 돌리는 와중에 어느 미친 작자가 더위를 패키징해서 판매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정월 대보름의 관습을 형체화시켜서 이를 중개하는 플랫폼을 개발, 중간에 수수료나 받아먹으면서 호의호식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매할 수 있는 더위의 단위는 1일, 1주일, 1개월, 1년 등으로 다양하였으며 드물게 블록딜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더위가 비재화인 곳이 있는 한편 재화인 곳도 존재하였으므로 지구가 공전할 때마다 북반구와 남반구가 번걸아가며 더위를 수요하거나 공급했다. 누구든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음에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개발자는 예상대로 떼돈을 벌었다.


그러나 서기 20XX년 지구를 덥게 만든 돈으로 자신은 시원하게 만드는 기막힌 관습이 풍토병처럼 퍼진 즈음 지구는 견딜 수 없이 뜨거워졌다. 북반구 남반구 할 것 없이 더위를 팔아먹는 사람만 있고 사려는 사람은 곧이 나타나지 않았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당황했다. 우왕좌왕하던 중 더위가 목숨까지 앗아갈 지경이 되자 사람들은 본인을 구하기 위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결국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희생양, 아니 희생인, 이었다. 원리는 간단했다. 주기적으로 100억 가까운 인구 중 한 명을 골라 그에게 모든 더위를 강매하자. 더위를 한껏 품은 그는 당연히 죽을 것이다. 유족들이 슬퍼할 테니 더위를 팔아넘긴 값을 위로금으로 지급하자. (당시 더위는 공급하는 사람만 있고 수요하는 사람은 없어서 가격이 음이었다.) 어차피 더위로 몇몇이 희생된다면 그 더위 몰아서 한 명만 고생시키는 게 너무나 타당한 결론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혜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미리 생각했으면 나도 떼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입법자들은 참으로 아쉬워했다.


그렇게 100억 분의 1의 확률로 인류 사회의 행복은 적당히 유지되었다. 지구의 회복 전략은 번번이 무산되었고, 에어컨은 잘만 돌아갔으며... 강렬한 태양뿐 아니라 자기 위에 얹혀 사는 것들마저 자신을 괴롭힌다 생각한 지구는 메마른 와중에 억지로 눈물이나마 지으려 한다더라. 아, 이 더위에 비 오면 습하기만 하고 짜증나는데. 제습기가 어딨더라? 빨리 강력으로 틀어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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