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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Jan 04. 2023

색 공포증

"색 공포증이 있어요."


"색이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인다. 두꺼운 안경은 알의 채도가 무척이나 낮았는데 선글라스가 아니고서야 세상을 볼 수 없는 지경인가보다. 그럼에도 세계를 완전히 흑백으로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가끔 새어나오는 빛은 어떻게 처리하느냐 물어봤더니


"견딜 뿐이에요."


라며 고개를 젓는다. 가시광은 온통 저주뿐이었다.


의외로 한낮과 오밤 중에는 후자가 더 싫다고 말한다. 해가 지면 온갖 게 시꺼매지니 좀 편하지 않느냐는 평범한 추론에 대해


"저를 방심시켜요."


하며 에피소드 하나를 전한다. 본인도 처음부터 밤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말마따나 어두운 부분이 많을수록 그의 눈은 편안해졌다. 도심이 아니라면 안경을 벗어도 버틸 만해서 조용한 시골길은 그의 유일한 안식처이기도 했다고.


그러나 어느 날 오밤을 산책하는데, 희미한 가로등 밑 평소답지 않은 색채가 강렬해서 공격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남녀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사랑을 풍기는 장면이었다. 그는 색 이상의 울컥함을 느끼고 곧바로 물러나


"억울해. 밤마저도 내 것이 아니라니."


하고 엉엉 울며 뛰었다고 한다.


한편 좋았던 점을 떠올릴 수 있겠냐는 질문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아요."


하며 두 번째 이야기를 전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혈액 공포증을 가지고 있고, 특히 자신이 피를 바가지만큼 쏟을 때에는 과다출혈 이전에 쇼크로 기절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때는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다. 정신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손에 피 묻을 각오를 하고 환자를 옮겨야 한다.


어느 날 대낮을 산책하는데, 꽝 하는 소리에 근원을 찾으니 교통사고가 크게 난 모양이었다. 행인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적에 그는 주저치 않고 운전자 및 동승자를 꺼냈다. 핏물로 흉측해진 그의 사지를 보고 주변인들이 걱정되어 묻자


"괜찮아요. 사고는 저에게 맡기세요."


하고 웃으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저주인지 축복인지 평해달라는 마지막 물음에


"견딜 뿐이에요."


라며 고개 한 번 까딱 않고 대답하더니


"생사처럼요."


라고 부연해주었다. 과연 모든 것은 주어지고 견뎌내는 것이었다. 생과 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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