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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May 21. 2023

성장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게임을 진득하게 했다. 캐릭터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이른바 "성장 재료"라는 것들이 필요하다. 종류도 많고 수도 넉넉한데 문제는 캐릭터가 성장할 때마다 추가적인 성장을 위해 요구되는 재료가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래프로 그리면 기울기가 점점 가팔라진다는 얘기다.


개발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한 설계이기는 하다. 요즘 게이머들은 게임에 몰입하는 정도가 살벌해서 게임 내 컨텐츠를 순식간에 소비해버린다. 컨텐츠의 소비와 개발이 경쟁적으로 맞붙게 되는데 이때 후자가 패배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만드는 데 5시간 걸리는 요리라도 먹는 데에는 5분밖에 걸리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개발자는 어떻게든 컨텐츠 소비를 늦추고 싶을 테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장 재료의 점증을 이해할 수 있겠다. 어차피 캐릭터가 강해질수록 재료를 모으기도 쉬울 테니 명목적인 요구량에 비해 실질적인 요구량이 낮을 것이기도 하고.


이러한 설계는 현실적으로도 타당하다.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다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둔화되기 마련이다. 낮은 단계에서의 성장은 단지 무언가를 접하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라서 성장과 개선이 나날이 목격된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야, 재미 붙여도 좋겠어, 라는 낭만이 떠다닌다. 그러나 단계가 차례차례 높아지면서 전과 같은 극적인 성장은 없고 벽만 높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재미 없으니 그만둘까, 같은 권태로움이 지배한다.


그렇다면 성장 경험은 왜 감속하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컨텐츠의 논리적 구조 때문이다. 게임이든 공부든 무엇을 깨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작은 슬라임을 잡아봐야 큰 슬라임을 잡을 수 있고 삼각형을 알아야 피타고라스 정리를 배울 수 있다. 높은 단계 컨텐츠는 낮은 단계 컨텐츠의 총계 혹은 그 이상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둘째, 운적인 요소 때문이다. 학습은 생각보다 많은 운이 따르는 과정이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접했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능을 지녔는지 등 수많은 우연이 중첩되어 학습 현장을 만들어낸다. 낮은 단계에서는 백지에 가까운 상태라 무엇이든 배울 게 있어 운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높은 단계로 나아갈수록 새로이 배워야 할 영역이 나의 기질에 들어맞을 확률이 줄어든다. 해당 영역을 습득하려면 수많은 시도가 따라야 하고, 그에 따라 노력 대비 산출은 필연적으로 감소한다.


완벽해질수록 흠이 더 눈에 띄는 법이다. 펄을 잔뜩 뒤집어쓴 진주조개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반면 옥의 티를 견디지 못 하는 사람들은 많다. 사소한 티를 하나하나 없애기 위한 노력이 펄을 씻어내는 노력보다 더 고생스럽다는 것을 누구든 알고 있을 이다. 내 캐릭터가 딱 그런 상태이다. 레벨 올리기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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