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과 법에서의 시간 문제

by ggom

1. 문제점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할 때 사회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법체계에는 상당한 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 눈여겨 보아야 할 문제는 단연 "시간"을 다루는 기일, 기간, 시효 등의 문제이다. 모든 당사자가 현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므로 역법에 따른 시간 계산은 무력화된다. 이 경우 시간에 관한 법적 개념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해본다.


2. 시간여행의 속성

논의에 앞서 시간여행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갖는다고 전제한다. 이하는 사고실험에 가까운 논의이므로 각 속성의 물리학적 실현 가능성은 따지지 않겠다.

1) 시간여행은 어느 시간대로든 가능하다.

2) 시간여행으로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즉 타임 패러독스는 일어나지 않는다.

3) 시간여행자의 시간 자체는 역행하지 않는다. 즉 시간여행자는 같은 속도로 나이를 먹는다.


3. 법체계에서 시간 개념의 수정

가. 사례와 그 분석

예컨대 2026. 3. 31. 갑이 을에게 금전을 대여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그 변제기를 2027. 3. 31.로 하였다고 하자. 만약 을이 변제기가 지나고서도 변제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지체책임이 발생한다. 또한 일반적인 채권의 소멸시효는 10년이므로 을이 10년 동안 변제하지 않고 버티면 2037. 4. 1.에 갑의 을에 대한 채권은 소멸시효 완성으로 소멸한다. 그렇다면 을로서는 2037. 4. 1. 이후로 시간여행을 하여 줄곧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갑의 채권 행사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예방하기 위하여 법체계상 시간 개념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가?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몇 가지를 정의하고 넘어가겠다. 시간여행이 불가능한(혹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우리가 쓰고 있는 역법에 따른 시간 개념을 이하 "객관적인 시간"이라 칭한다. 한편 시간여행이 가능할 때 각 시간여행자가 경험하는 시간 개념을 이하 "주관적인 시간"이라 칭한다.


사례에 덧붙여 설명한다. 2026. 3. 31. 기준으로 갑은 정확히 31세, 을은 정확히 25세이고 그 전까지 둘은 단 한 번도 시간여행을 한 적이 없다고 하자. 만약 갑이 계약 체결 직후 첫 시간여행으로 2027. 4. 1.에 도착하였다면, 갑은 계약 체결과 동시에 변제기가 도달한 셈이 되고, 그는 여전히 31세이다. 반면 을은 정직하게 1년을 보냈고, 그는 변제기가 도달한 시점에 26세이다. 2027. 4. 1.은 갑의 체감으로는 2026. 3. 31.과 다르지 않은 반면, 을의 체감으로는 2027. 4. 1.이다. 이 사례에서는 객관적인 시간이 을의 주관적인 시간과 같고 단지 갑의 주관적인 시간만 괴리되었다. 만약 갑과 을 모두가 시간여행을 하였다면 객관적인 시간, 갑의 주관적인 시간, 을의 주관적인 시간이 모두 괴리되었을 것이다.


객관적인 시간을 고집하는 것은 수많은 불합리를 낳는다. 당장 위의 사례에서도 갑은 세월의 인고 없이 곧장 을에게 채권의 이행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반대로 을이 2026. 3. 31.에서 2027. 4. 1.로 시간여행을 한다면 그는 아무런 이득도 없이 곧장 갑에게 변제해야 할 불리한 위치에 있게 된다. 한편 을이 2037. 4. 1. 이후로 시간여행한다면 갑의 채권이 소멸시효 완성으로 소멸한다는 것은 위에서 쓴 바와 같다.


이러한 문제는 객관적인 시간과 주관적인 시간이 분리된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시간들끼리의 분리에서 기인한다. 객관적인 시간이야 어찌 되었든 당사자들끼리만 동일한 세월을 경험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갑에게 2027. 4. 1.인 날이 을에게도 2027. 4. 1.이라면 어떠한 객관적인 시간에서든 양자가 만나 채무를 이행하고 수령하면 되는 것이다.


나. 대안

우리는 법체계에서 객관적인 시간을 배제하고,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으로서 "나이"를 도입해야 한다. 나이는 시간여행자가 위치한 시점과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속도로 가산되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서 갑과 을은 다음과 같이 계약을 수정할 수 있다. 갑은 을에게 갑이 31세일 때(을이 25세일 때) 대여하고, 변제기는 갑이 32세일 때(을이 26세일 때)로 한다. 을은 자신이 26세일 때부터 지체책임을 지고, 36세일 때 소멸시효의 완성으로 책임으로부터 해방된다. 여기서 나이가 꼭 정수일 필요는 없고 나이 먹은 정도에 따라 31.5세, 26.3세 등으로 정확히 표시 수 있다.


나이를 이용한 주관적인 시간은 비단 계약뿐 아니라 객관적인 시간을 명시해왔던 소송행위 등에서도 원용할 수 있다. 법원이 몇 년 몇 월 며칠로 기일을 잡았다면, 당사자에게는 그의 나이에 맞춰 고지하면 된다. 이때 당사자들이 어떤 시점의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할지 결정하기 위해 객관적인 시간을 부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예컨대 을이 갑에게 채무를 이행하지 않아 갑이 이를 소로써 구하고자 한다면, 법원은 갑이 32.5세일 때(을이 26.5세일 때) 2026. 1. 1. 기일을 진행하는 법원에 출석할 것을 고지할 수 있다. 2026. 1. 1.은 단지 사건을 다룰 특정 법원을 지정한 것에 불과하므로 임의의 날짜여도 된다. 이러한 소송 진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법체계가 모든 시점을 초월하여 존재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는 시간여행자의 법적 지위와 범시공간적 공동정부를 참고하기 바란다.


4. 결론

시간여행은 기회주의적 행동의 비용을 크게 낮추어 체계의 규범력을 흔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행태에 맞서 준거법의 문제에 대해서는 범시공간적 공동정부, 기일이나 기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이 등의 방법으로 가까스로 체계를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권리가 모든 시간에 존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시효 등의 제도 자체가 사회와 모순될 수도 있고, 논의의 뒤편으로 밀어넣은 타임 패러독스의 가능성은 권리의 실재 여부를 의심하게 한다. 세계관의 설정에 따라 본 글의 답변도 달라질 수 있기에, 깊은 고민에 따라 차차 수정해나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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