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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Apr 02. 2017

고무줄이 모험을 떠난다고 했다

조금은 슬퍼졌다. 고무줄이 모험을 떠난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책상에 있던 고무줄이었다. 제대로 펴있는 모양은 커녕 누가 장난친 것인지 항상 똘똘 뭉쳐있거나 꼬여있어서 자신의 탄성계수를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 번은 작정하고 그를 풀어주었고 곳곳이 구부러져서 더이상 부드러운 곡선은 아니었지만 뭐 어때 하는 모양이었다. 미분 가능하지 않아도 연속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 같았다. 미분 가능하지 않은 함수라니 너는 1계조건도 제대로 만족하지 못하겠는걸, 말을 걸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놀라웠다.


1계조건이 뭐지.


생각해보니 나도 1계조건이 뭔지 잘 몰랐던 것이다. 1계가 어째서 2계가 아니고 1계인가 2계를 1계로 두고 1계를 2계로 둘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1계와 2계를 모두 만족해야 충분조건인 것이다. 하나만 있어서 필요조건이라면 넘버링 정도는 상관 없는 것 아니냐 하고 고무줄은 묻고 있었다. 과연 그랬다. 차라리 둘 다 0.5계라 하고 둘을 더해서 1이라고 하는 게 더 쉽고 아름다워 보여. 과연 고무줄이었다.


0.5+0.5=1, 양변을 두 배 하면 1+1=2네.


그는 당연한 소리를 했다. 한 개가 있고 한 개가 있으면 두 개인 거야. 한 명이 있고 한 명이 있으면 두 명인 거야. 한 포기가 있고 한 포기가 있으면 두 포기인 것이고...


그렇지 않아.


그는 반문했다. 반문이라고 안철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1+1=2라는 명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내지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든지 몸을 늘릴 수 있어. 탄성계수를 넘어가는 순간 나는 늘어난 그 자체가 되어버려. 내가 담을 수 있는 면적은 늘어난대도 유한하지만 나의 질량과 부피는 영원하리ㅡ 그는 명언 같은 말을 하기 좋아했다. 비록 우리의 목숨은 영원하지만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영원하리ㅡ 같은 말이었을까. 불행히도 그는 틀렸다. 그에게 영원한 것은 오직 에너지이며, 물론 그 에너지도 본인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가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에너지는 영원히 우주에 귀속되고 우리는 그 일부를 잠시 빌려쓸 뿐. 나는 그에게 설교하였다.


곧 가는 사람한테...

이러저러 따지는 거 아니야.


그렇다. 생각해보니 그는 나에게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했던 것이 이 이야기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흥, 갈 테면 가라지, 이 바보, 같은 모습으로 그를 맞이한다면 그는 분명 소름 돋을 게 분명했다. 뭐... 뭐야 그 표현은. 인간계의 표현이라는 거야. 으음, 그런가, 하고 오직 1차원으로 살아갈 뿐인 고무줄은 말했다. 2차원을 인간계로 넣어야할지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뭐 1차원 입장에서는 2차원이나 3차원이나 본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니까. 2차원은 벡터의 기저가 2개이고 3차원은 3개, n차원은 n개라고 설명해봤자 개같은 놈아 선한테 뭘 가르쳐 따질 게 분명했다. 상상력은 무한이래도 결국 보는 것에 갇히게 되어있다. 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론만 주구장창 외워봤자 마음 속으로는 이게 뭐시여 하는 게 공부라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나는 간다.


그는 요리조리 움직였다. 엉켜있는 몸은 고무줄이 탄성을 발휘하기에는 최적의 상태였다. 지렁이 앞으로 나아가듯이 줄였다 늘렸다를 반복하면 그는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렁이는 본인의 변을 통해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고 인류의 농경을 책임지겠지만 고무줄은 제때 썩지도 않아서 인류 이후에도 지구를 계속 망칠 것이라... 나는 잠깐 침을 삼켰다. 인류와 지구를 위한 결단에 나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장 쓰레기통으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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