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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Jan 10. 2020

행복의 불확정성

무엇이든 모호한 게 좋아. 어제는 절대 바뀔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해서 무뎌지지 않는 칼은 만질 때마다 상처를 주지. 오늘 하루는 인생에서 매우 얇은 날이고, 당장 드라마를 기대하기에는 나의 행동력이 과감하지 않아. 결국 나는 내일을 봐. 내일은 지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날이 될 것이라고 기대해야만 먹고 자는 게 의미가 있었으니까.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행복이라는 존재, 그 모호한 기대감에 안주하려 했었던 거야. 애초에 정체를 알 수가 없었거든. 어떤 일을 잘 하는지, 혹은 잘 해야 하는지는 알아도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는 알아내기가 힘들잖아? 길 가다가 우연히 주울 수 있는 양 행복을 대하면 인생의 의무와 권리, 모두 챙길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닌가봐.


양자역학에 흥미를 가진 건 아무도 못 알아먹는다는 희소성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과학에서 모호함을 이야기하는 게 정말 신기했기 때문이야. 과학이 있다면 세상 모든 걸 쪼개고 분석해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어. 전자는 항성을 공전하는 행성 같은 게 아니라 핵 주변에 퍼져 있는 뭉게구름 같은 거라, 우리가 제대로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얘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알 수 없어. 그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관측이라는 행위를 통해 여러 파동함수 중 하나로 확정을 지어야 해.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는 뜻이지. 이 사실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져.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다.


물론 인생은 과학이 아니지. 설계가 가능했다면 이런 모습을 갖거나 이런 궤적을 밟아오지도 않았을뿐더러, 내비게이션이 달려 있어서 굳이 앞길을 고민할 이유도 없었을 거야. 한치 앞도 알 수 없음에 크게 감사해. 정해진 길만 가는 것만큼 시시한 일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 모호함을 이유로 하루를 방기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 행복의 불확정성을 완전히 해소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몇 개의 파동함수는 찾을 수 있겠지. 그걸 찾아나가는 게 인생이겠고. 행복을 가까이서 관측할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단 몇 가지 모양의 행복이라도 품에 안고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부대 복귀하기 싫어서 별 생각이 다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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