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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Jan 18. 2020

맛과 향

사과*를 먹었는데 이상한 맛이 난다. 귤을 먹었는데 이상한 맛이 난다. 물을 마셨는데 이상한 맛이 난다. 낮은 확률로 각각이 상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오늘 기막히게 운이 나쁘거나 혹은 나의 입맛이 나쁘다고 할 수 있겠다. 상식 선에서 후자가 맞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했다. 무엇이 나의 입맛을 상하게 했나?

* 밤 사과가 나쁘다는 속설이 있는데 잠깐 무시하도록 하자. 그 이상으로 사과를 좋아하는지라;

범인은 가까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씻고 나서 토너고 스킨이고 신나게 바르고 나서 바로 음식을 집었던 게 원인이었다. 화장품 향이 맛을 모조리 망쳐버린 것이었다. 비록 입에는 직접 화장품을 바르지 않았지만, 그 주변에 있었다는 이유로 나의 후각을 자극했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왜곡했다. 나는 이유 모를 슬픔을 느꼈다.

맛을 느끼는 데 향은 매우 중요한 역할 ㅡ 사실상 맛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과 코를 틀어막고 양파를 먹이면서 사과라 알려주면 곧이곧대로 믿는다지 않는가. 그러나 먹는 일을 수행하는 건 입과 혀인데 맛에 큰 기여를 못 한다는 건 두 기관이 충분히 억울해할 일이다. 열심히 일했는데 코가 오작동했다는 이유로 맛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 했으니, 인생의 크고 작은 기회를 놓치는 것만 같다.

별 고민 없이 살았을 때에는 세상 전부가 내 것은 아니라도 일부는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슬픈 일 못지 않게 즐거운 일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고점과 저점에 대한 판단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파란 불이 길지는 않을지언정 빨간 불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저점의 관성은 짧지 않았고 신호장애는 긴 시간 나를 정지시켰다. 군 복무를 포함한 모든 일은 쌩쌩 지나갔다. 덕분인지 탓인지 말년이 지루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 오직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방심은 걷고 뛰는 재미를 공포로 재해석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을 해도 잘 해낼지 못 할 것 같고, 무엇에 뒤쫓기다 금방 넘어지리라는 상상이 전신을 마비시켰다. 어차피 상처받을 것이니 차라리 나아가지 않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왜 우울증 환자들이 의외로 우울증을 해결하기 꺼려하는지 알 듯도 했다.

하지만 진통제로 당장의 감각을 줄여둔 지금이 진정한 식사가 아님을 안다. 인생의 맛은 이것보다 훨씬 짜거나 쓰거나 가끔은 달기도 했다는 걸, 요리가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시도만으로 충분히 보람찼다는 걸 안다. 우울의 향으로 삶의 맛을 비틀기에는 삶의 맛있음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 맛을 되찾고 싶어졌다. 다행히.

화장품을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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