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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Jan 03. 2020

자기 폰을 자랑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은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지만 정작 본인의 모습은 담아내지 못 한다. 본인을 품에 안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다른 스마트폰으로 본인을 촬영하여 이를 전송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는 일뿐이다. 오직 타인에 의해서만 확인되는 존재. 사람과 별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과는 달리 우리는 조금이나마 본인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팔다리에 토르소까지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노력한다면 코와 짙은 눈썹까지 확인 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얼굴만큼은 도저히 우리 힘으로 볼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묘사를 듣던지 카메라나 거울을 이용해야만 한다. 카메라와 거울을 직접 만들어내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스스로에 대해 알아낼 길이 사실상 전무하다. 이 사실은 다소 비극적으로 들린다.


개인에 집중하는 현대사회는 모든 면에서 홀로서기를 강요해왔다. 그대는 공부도 잘 해야 하고 좋은 직업을 얻어야 하며 멋진 반려자를 만나 여생을 흠없이 살아가야 한다. 타인과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것을 주창하면서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게 만드는 이 아이러니*는 수많은 마음의 먹구름을 만들어냈다.

* 결국 우리는 삶의 다양성이라는 횡적인 측면과 그 질적, 자본적 수준이라는 종적인 측면에서 "남과 비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아이러니는 "비교"와 "경쟁"이라는 키워드로 해소된다.

따라서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타인의 시선으로 구성된다면 그만큼 슬픈 일이 없을 것이다. 온전히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마저 순위를 매기기 위해 해체되고 분석된다면 자존감이 한없이 떨어질 일이야 뻔하다. 누군가는 항상 우리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다. 비교는 사람들을 보채고 불안하게 만들어 더욱 노력하게 만들기 위한 영악한 사회 구동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를 알더라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타인이라는 사약은 얼마든지 보약으로도 쓰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기파멸적으로 이끄는 비교주의적 속성을 제거한다면, 타인의 시선은 우리에게 "객관화"라는 큰 장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우리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해서 미처 보지 못 했던 일들, 예컨대 의도치 않은 말버릇부터 중대사를 앞둔 마음가짐 등을 그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정체성이라는 프로그램을 가끔씩 실행할 때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이게 지금 돌아가는 중이구나 깨닫게 된다.

나를 파괴시키는 것도, 반대로 나를 세우는 것도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타인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아이러니가 아닐지.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 속에서 만난 이들과 애정, 교훈 따위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만큼 기쁜 일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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