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곰하게 정의하는 특권(特權)
특권(Privilege)의 사전적 의미를 재정의하자면, 그것은 '대다수가 따라야 하는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명시한 우리 헌법은 이러한 특권을 부정하지만, 인간사가 펼쳐지는 현실 세계, 특히 법보다 감정이 앞서는 관계의 영역에서 특권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특권은 규칙이 느슨하고 모호할수록 더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 '관계의 특권'을 일상적으로 목격한다. 낯선 타인의 무례함에는 날 선 방어기제가 작동하지만, 20년 지기 친구의 거친 농담은 오히려 친근함의 징표로 받아들여진다. 타인에게 적용되는 '예의'라는 엄격한 규칙이, 오랜 친구라는 특권층에게는 면제되는 것이다.
이 현상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단연 남녀 관계다. 누군가 "난 원래 그래"라고 말할 때, 상대방에게 애정이 없다면 그 말은 이별의 사유가 되는 고집불통의 증거일 뿐이다. 하지만 깊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그 말은 이해하고 감싸 안아야 할 연인의 고유한 특성이 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사랑에 빠진 당사자가 겪는 '규칙의 붕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만의 방어 기제와 기준을 세우며 살아간다. "난 연하는 절대 안 만나", "연락 늦는 건 질색이야." 그러나 진짜 사랑이 찾아오면, 철옹성 같았던 이 기준들이 소리 없이 허물어진다.
"이전 사람들과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나 원래 이런 거 정말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러한 자기 객관화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혼란스러워하기보다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아, 내가 이 사람을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 내가 세운 원칙보다 그 사람의 존재가 더 거대해졌을 때, 우리는 기꺼이 상대방에게 나라는 사람의 규칙을 무시해도 좋은 '특권'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왜 누구에게는 칼 같은 잣대를 대고, 누구에게는 이토록 관대해지는가? 이 불공정한 메커니즘의 핵심은 무엇일까?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큰 일에는 원칙을 적용하고,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관계에서 특권이 발생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사랑과 신뢰는 상대방의 실수나 모난 부분을 '큰 일(원칙의 대상)'이 아닌 '작은 일(연민의 대상)'로 격하시키는 힘을 갖는다. 타인에게는 용납 못 할 무례함이, 사랑하는 이에게는 귀여운 투정이 되거나 이해 가능한 사정이 된다. 감정의 크기가 커질수록, 적용해야 할 규칙의 엄격함은 반비례하여 작아지는 것이다.
물론 특권을 갖는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이 유리하다. 특권을 쥔 사람은 더 자유롭고, 더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불공정함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해하면 더 지혜롭게 관계를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것을 이해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은 "특권은 내가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부여받는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대해질 수 있는' 존재, 즉 대체 불가능한 친밀함과 신뢰를 쌓았을 때 비로소 규칙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특권을 상대방에게 받는 것이다. 이를 이해했을 때, 특권을 얻기 위해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전략은 나 또한 상대방을 존중하고 연민으로 대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것을 이해했을 때 내가 관계 속에서 누리는 이 특권은 내가 특별해서가 아닌 상대방이 나를 특별하게 여겨서 갖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기질은 그저 하나의 '몸짓'일뿐이다. 그것이 곧 내가 가진 특권의 정당한 근거가 될 순 없다. 내가 가진 기질을 상대방이 특별하게 여기기에 내게 특권이 부여된 것이다. 이는 관계에서 오만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게 해 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결국 사랑과 우정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그저 '몸짓'일뿐인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이름을 불려주며 '유일한 예외'로 서로에게 꽃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의 영역에서 주어지는 특별한 예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