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번개맨의 등장

by 초봉

사람은 초인적인 힘이 나올 때가 있다. 무언가 마무리가 임박했을 때 나의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녀석에게도 그런 초인적인 순간이 있으니, 바로 졸릴 때이다. 녀석은 졸릴 때 칭얼칭얼 거리는데, 그러다 너무 스스로 악에 받쳤는지 첫 뒤집기를 시전하였다. 얼마 뒤에는 또 악에 받쳐 뒤집은 상태에서 되돌아 가기도 했다. 그랬던 녀석이 태어난지 정확히 190일이 되던 그날 너무 졸린 상태에서 역시나 악에 받쳐 처음으로 기었다.

긴다고 해서 군인들이 포복하듯 팔과 다리를 쭉 뻗어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엎드린 상태에서 엉덩이를 한껏 들어올려 앞으로 엎어지는 형태로, 엄밀히 말하면 배밀이 같은 느낌이다. 어찌되었건 뒤집기를 통해 가로로만 움직이던 녀석이 이제는 세로로 움직일수 있는 요건이 생긴 것이다.

녀석이 생기기전 '애기들은 하루하루 다르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낳아보니 그 말을 제대로 알겠다. 처음 약 2번 정도 기던 녀석이 다음 날에는 한 5번 정도 연속으로 기었고, 그 다음 날에는 기는 것과 뒤집는 것을 병행하여 어디든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눈에 불을 킨채 기며, 뒤집으며 평소 그렇게 만지고, 빨고 싶었던 찍찍이(바닥청소용품)를 향해 돌진하기도 하였다.

또, 보행기를 탔을 때는 매일 뒤로만 가던 녀석이 기기 시작한 이후에는 앞으로도, 옆으로도 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녀석은 관상용 풀을 뜯어 맛도 보았고, 선반에 있던 미니언즈 인형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굴욕을 경험해야했다.

누군가가 말했던 '헬'의 시작인가. 그 덕분에 우리는 바닥 매트의 위치를 조정하고, 펜스를 치고, 선반에 있던 물건을 정리하는 등 번개처럼 움직이는 녀석이 저지를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해야했다.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녀석은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있고,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넓은 범위를 움직이며 사고를 치고 있다.

아빠의 입장에서 녀석이 쳐다보다 웃고, 뒤집고, 손을 내밀고, 기는 행동 까지 하나하나 발전하는 것은 무척이나 반갑다. 얼른 걷고 뛰어서 공놀이를 같이 해주고 싶은 마음도 크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거나 아직은 좁은 시야 때문에 어디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번개맨이 다치지 않도록 여러가지 대비를 다짐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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