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째 날
버스 중에서도 아래 등급인 Deluxe 버스를 타고 델리로 돌아가는 길. 이름은 Deluxe인데 실제론 전혀 Deluxe가 아니다...(왜 이름이 디럭스지?) 그래도 버스엔 좌석마다 콘센트도 있고(작동은 하려나...) 에어컨 대신 선풍기도 하나씩 달려있다. 좌석은 옛날 시내버스 같다. 먼지만 가득하고 푹신함은 사라졌다. 버스 문과 창문에서는 닫혀있는지 열려있는지 모를 정도로 찬바람이 들어온다. 침낭을 펴고 앉아있어도 전혀 따뜻하지가 않다. 발이 시리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속도도 줄이지 않고 슁 달린다. 진짜 사고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차선이 있는지 없는지 앞에서 차가 달려오면 왼쪽으로 살짝 비키고 속도는 줄이지 않는다.
빠르게 달리던 버스에서 기여코 일이 터졌다. 타이어에 빵꾸가 난 것이다. 갓길에 차를 대고 타이어를 교체한다. 아저씨가 끼긱끼긱 하시더니 어느새 그 큰 타이어 교체를 끝냈다. 나는 그새 오줌보를 비웠다.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배아픔은 정말 나에게 위험한 상황을 가져왔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깜깜한 밤중 기름이 떨어졌는지 산속 주유소에 잠깐 들렀다. 휴게소가 아니라 그런지 사람들은 내리지 않는다. 아까 살살 아팠던 배가 이젠 많이 아프다.
'곽씨... 나 너무 많이 먹었나 봐... 화장실 다녀올게...'
나를 두고 출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주유소 뒤편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하... 근데 누가 들어가 있다. 배의 꾸륵거림은 점점 더 심해지고 뱃속 친구들은 밖으로 나가겠다며 아우성이다.
'제발 빨리 나와주세요... 지금 바지에 싸기 일보직전이란 말입니다... 하....'
아마 급똥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급똥의 일분일초가 얼마나 스릴 넘치고 위험하며 초조한 순간인지를! 나도 필사적으로 엉덩이에 기운을 모으며 뱃속 친구들을 열심히 가둬본다. 근데 슬슬 한계점이다. 이 친구들이 방어선을 뚫기 직전이다!
다행히 안에 있던 사람이 나왔고 나는 거사를 치를 수 있었다. 사실 시작하자마자 차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리며 엔진 도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아니겠지?'하면서도 불안하다. 하던 일을 멈추고 후딱 달려 나갔는데... 버스가 없다?
'안돼!!!!!!!!'
저 앞에 버스가 방향을 바꾸고 본 도로로 합류하려 움직이고 있다.
'나 좀 데려가! 나 여깄어!'
버스 앞을 가로막고서야 차에 올라탔다. 진짜 인도 미아가 될뻔했다... 곽씨 말로는 자기가 멈추라고 했는데 무시하고 그냥 가더란다. 아무튼 탔으니 됐지... 델리에 도착하기 전 다시 급똥의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리에 앉아 조금이나마 잠을 청해 본다. 하지만 옆에선 머리를 흔들며 리듬을 타는 곽씨와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발이 너무 시려 잠을 잘 수가 없다. 꿈뻑꿈뻑 졸다 보니 새벽 5시쯤 델리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원래 기차로 델리에서 심라까지는 12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로는 8시간이 걸렸다! 빠르긴 훨씬 빠르네
짐을 챙겨 내리려는데 곽씨가 불안하다.
'야 큰일 났어. 침낭 커버가 없어.'
빛을 비춰가며 구석구석을 찾아봤지만 침낭 커버가 없다!
'야 일단 내리자'
버스에서 내리니 릭샤꾼들이 우르르르 몰려온다. 총 6명의 릭샤꾼들이 곽씨를 둘러싸고 호객을 한다. 안 탄다고 말해도 요지부동이다. 계속 조잘대며 사람 혼을 빼놓는다. 나는 옆에서 그 상황이 너무 웃겨 웃고 있었다.
[새벽 5시의 어두움 + 릭샤꾼 6명의 호객 + 침낭 커버 수색]
이 세 가지 공격을 곽씨는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폭발했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닥쳐! 닥치라고!' (영어로 말하면 알아듣고 해코지당할까 무서워서 한국말로 소리 질렀다고...)
진짜 곽씨의 화산 폭발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델리에서 발에 똥칠을 했던 것 다음으로 좋은 구경거리였다. 릭샤꾼들은 우리가 떠난 후에도 먹이를 기다리는 하이에나처럼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아무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 새로운 곳에 남겨졌고 무거운 어둠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만 떠돌고 있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구글 지도뿐. 일단 저 멀리 보이는 버스 터미널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또다시 찾아온 불청객을 맞이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푸덕푸덕'
'아... 물갈이를 시작하는구나...'
2년 전 중국에서 물갈이를 4일 넘게 하며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기에 걱정이 앞선다. 어디를 가든 최대한 많은 화장실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미션이다.
일단 뱃속 전투를 마무리짓고 정신을 차려보니 근처에 지하철 역이 있다. 우리가 익숙한 뉴델리역으로 지하철을 타고 빠하르간지 여행자 거리에 가기로 한다.
지하철을 타려고 검문소를 통과하는데 걸렸다...!
'너희 이 화면에 잡힌 거 뭐야?'
'저거? 술인데?'
'왜 술을 가지고 있어? 그거 금지야 꺼내봐'
가방 속의 술을 꺼내 확인해주고 나서야 지하철 역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철에 술을 가지고 타는 건 금지야.'
바로 뒤 어떤 아저씨는 가방 속에 농작물과 낫이 있었는데 검문소에 걸려서 낫을 뺏겼다. 하나 배웠다.
'인도에 있는 수많은 검문소는 그냥 이름만 검문소가 아니라 실제로 일을 하는 곳이다!'
다행히 뉴델리역은 3 정거장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맨 앞 열차를 타니 온통 여자들 뿐이다.
'여기 여자 칸이야. 다른 곳으로 가'
새벽녘에 외국인 두 명이 지하철을 타고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부끄럽...
뉴델리 역에 내리자마자 기분이 좋지 않다. 수많은 소음, 호객행위, 매연 등. 사람들이 왜 뉴델리를 잠시 거쳐가기만 하는지 알겠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델리에서 여행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어떻게 사기를 잘 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자들 같다. 개인적으로 인도의 뉴델리는 다시 오고 싶은 곳은 아니다. 수많은 호객꾼들과 노숙자들을 뒤로하고 빠하르 간지로 향했다.
인도 여행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인도 방랑기 식당은 S.B. 여관 꼭대기층에 있는데, 우리가 델리에 있을 때 묵은 숙소이기도 했고 짐도 맡아주는 곳이라 인도방랑기에 갔다. 7시가 되기 전이라 여관 관리자들은 자고 있었는데 문을 두드리자 다행히 우리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한인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인도방랑기는 7시 반에 문을 열기에 식당 앞 계단에 쭈그려 앉아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아침으로 짬뽕 정식을 먹는다. 흠.... 솔직히 말하자면 350루피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비해 그리 맛있지는 않다.(속닥속닥) 그래도 오래간만에 한국음식이라 반갑다. 사실 한국음식을 먹으니 앞으로 인도 음식을 못 먹겠다... 인도 음식을 먹은 지 1주일밖에 안됐는데 벌써 질린듯한 느낌이다. 역시 한국 사람은 한국 음식을...
오늘은 특별한 일정 없이 코넛플레이스 주변을 서성거리기로 한다. 코넛플레이스 잔디밭에는 연인들이 정말 많다. 진짜진짜! 인도가 아닌 유럽에 나와있는 기분이다. 너무 피곤했고 볕이 좋아 잔디밭에서 잘 익은 파파야 하나를 까먹으며 멍하니 있다 누워서 낮잠을 잔다.
저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코넛플레이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아걸고 시위를 한다. 정부의 코넛 플레이스 주차 관련 정책과 과도한 세율 등에 반하는 시위란다.
'인도라는 나라도 시위를 하는구나'
곽씨와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데 사람들이 한 명씩 우리에게 다가와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한다.
'어디 가는 거야?'
'우리 그냥 돌아다녀'
'여기 근처엔 ~~~ 가 있는데 릭샤 타면 10루피밖에 안 해. 너희 여행자니까 릭샤꾼들이 바가지 씌울 거야. 내가 대신 흥정해서 릭샤 태워줄게'
'괜찮아. 그냥 천천히 걸어갈래'
'아니 진짜 10 루피면 돼. 난 같이 안 가.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과잉 친절은 금물이라 했던가. 거부감이 몰려온다. 또 그 사람들이 진짜 호의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몰라도 왜 다 똑같은 레퍼토리로 말을 하는지는 의심이 갔다. 거기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깔끔하게 입었다는 사실도 괜스레 의심이 된다.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할게.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어서 그래.'
그래도 가지 않고 옆에서 계속 돕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더니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떠난다.
우연히 하키 경기장을 찾아 들어간다. 하키 선수들의 훈련이 한창이다. 볕이 정말 좋아 훈련 구경도 하고 휴식도 취할 겸 앉아간다. 계속 느끼한 음식들로 배를 채우고, 간밤에 잠도 못 자고, 거기다 물갈이 때문에 수시로 설사를 해대니 정신이 없다. 아무 의욕도 없고 식욕도 없고 그냥 멍하다.
멍하니 앉아 운동선수들을 구경한다. 계속 꾸륵꾸륵하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