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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발자 꿀 Oct 15. 2019

스웨덴의 가장 높은 산을 가다 2편

스톡홀름살이 13

1편(https://brunch.co.kr/@ggool/47)에서 이어진다.



멘탈 게임


점점 나무가 사라지고 땅은 돌로 덮였다. 눈 앞에 산등성이들이 훅 가깝게 보이면서 겹쳐진 사이로 큰 구름들이 지나다녔다. 본격적으로 산 표면을 완만하게 따라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산 옆구리를 가파르게 타고 오르는 계단이 나왔다. 바로 옆은 절벽이고 내가 밟고 물에 빠진 돌처럼 살짝 미끄러웠고... 완만한 경사를 걷는 것도 이미 힘든 상태였는데 아찔한 시야와 무서움이 피로를 부추기면서 다리가 무섭게 후들거렸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없는데 맹세코 걷는 것이 이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다. 바닥으로 발바닥을 꾹 누르면서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여기가 얼마나 무서웠냐 하면 앞에 걷던 A를 만나자마자 걷는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리가 몸을 지탱 못 하게 떨리고 넘어지면 죽을 것 같다고.


나는 이틀 연속 하루에 삼만보 넘게 걷는 것이 처음이라, 장시간 하이킹에서 오는 피로가 어떤 느낌이고 피로와 함께 정상까지 걸을 때 느끼는 감정을 몰랐던 것 같다. 내가 가진 도구는 요가뿐이다. 아쉬탕가 수련을 하면서 들었던 body work는 사실 mental game이라는 이야기를 산을 걸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쉬탕가 만트라(찬팅, 노래)를 몇 번이나 외웠는지 모른다. 소리 내서도 읊어보고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걸음에 맞춰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때만큼 힘들고 기나긴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다. 왕복 12시간 하이킹은 아쉬탕가 수련 한 시간 반과 우트플리티히를 10번 호흡 견디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긴 여정. 아무리 케브네카이제 코스를 어린이도 한다지만 나한테는 예습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는 어떤 속도로 걷고 숨을 쉬어야 하는구나, 돌이 많을 때는 어디를 밟아야 하는구나, 이만큼 다리가 아플 수도 있구나. 이런 사전 지식이 부족했다.


평소에 A와 걸을 때마다 느꼈는데 그녀는 성큼성큼 빨리 걷는 사람이라 같은 속도로 걸으려면 내가 서둘러서 쫓아가야 한다. 그리고 A와 D는 조깅도 자주 하고 긴 코스도 종종 뛰어서 다리를 쓰는 일에 익숙한 것 같았다. 속도가 다른 사람들이 등산을, 특히 3분만 가만히 서있으면 덜덜 떨리는 날씨에 같이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서로 흩어지지 않는 것. 그래서 A와 D는 앞서 걸으면서 내가 뒤에 안 보이면 잠깐 기다렸다가 나를 만나면 금세 식은 체온을 높이러 다시 갔다. 이렇게 그들은 나를 기다리면서 추위에 시달리는 동안 나에게는 필요한 만큼 쉬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생사를 확인하자마자 다시 가는 둘을 보면서 잠시 쉬면 간격이 더 벌어지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잠시간의 휴식도 없이 계속 계속 걷는 꼴이 된 거다. 나중에 들었는데 보통 50분 걷고 10분 쉬는 인터벌이 적절하고 50분 안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평소에 짧은 코스로 훈련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내가 기본 속도를 높이고 다 같이 휴식을 미리 계획하고 안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초록색으로 표시된 길이 일반 등산로다.


9월에 귀가 멍멍하게 바람이 불고 눈이 날리고


8km 근방에서는 눈바람과 구름 때문에 시야가 들쑥날쑥했다. 어느 순간 친구들이 내 시야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는데도 눈 때문에 길이 정말 미끄러워서 가방에 있는 아이젠을 꺼낼지 고민하면서 살금살금 걸어야 했다. 그렇게 땅만 보면서 걷다가 눈 때문에 길이 안 보여서 고개를 딱 들었더니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 눈, 바람 소리와 산이 전부였다.

등산로는 돌에 칠해진 표식이 전부. 눈 위로 발자국이 난 길이 두 개였다. 아주 아주 아주 다행히 오프라인 지도 앱을 미리 받아놨고 그 길을 따라갔는데 점점 내리막이 나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위의 지도를 보면 8km 지점에서 갑자기 내리막 그리고 정상까지 오르막인데, 미리 길을 보고 가지 않았던 나는 앱을 믿고 혼자 계속 가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A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신호도 안 가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나는 혼자 움직이기보다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모르는 사람들과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제야 앞에서 A와 D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둘 역시 나처럼 예상하지 못한 내리막에 놀란 것 같았다. 게다가 힘들어하던 나는 따라오지 않고. 나중에 들었는데 점점 가파른 내리막이 나오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쭉쭉 앞서가던 사람들이 한 지점에 대거 몰려있고 A는 그 길에서 몇 번 넘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나를 찾아 이야기를 하러 돌아왔던 것이다.

우리가 등산을 시작하면서 한 약속은 딱 두 가지, 흩어지지 않고 한 명이 상태가 나쁘면 돌아간다. 결정은 명백하게 나에게 달려있었다. 나는 미안하지만 내려가자고 했다. 이때 느꼈던 복잡한 감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친구가 훌륭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방해하여 폐를 끼치는 기분과, 길에서 쓴 엄청난 시간이 의미 없어지는 허무함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좌절감과, 하지만 더 묻지 않고 같이 내려와 준 고마움을. 그렇게 우리는 스웨덴에서 제일 두 번째로 높은 땅을 밟지 못하고 내려갔다.


하산


마음만 좀 가벼워졌을 뿐 돌아가는 길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산은 내려올 때 조심하라던데 점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아찔한 순간들이 있었고 한 번은 절벽 쪽으로 휘청했다가 땅을 찍고 있던 등산 스틱에 발이 걸려서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케브네카이제를 가는 사람들에게 모두 한 번씩 위험한 순간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번에 유독 좁고 높은 길에서 갑자기 피가 식는 기분을 몇 번이나 느껴야 했다. 사실 엄살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어떤 홈페이지에서는 난이도를 '중'으로 분류하고 또 어디에서는 12살 정도면 부모와 등산이 가능하다고도 쓰여있다. 이렇게 구구절절 엄살을 떨어도 나와 친구들, 작년에 갔다던 직장 동료들 모두 잘 돌아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사했던 길임에는 틀림없다. 급하게 잡은 계획과 충분치 않은 사전 지식이 아무래도 너무 큰 감정적 동요를 몰고 온 것 같다.


나는 내려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주변 풍경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거뭇한 산을 뒤덮은 눈, 구름과 안개, 켜켜이 쌓인 산 사이로 가끔 구름이 길을 비켜주면 보이는 노란색 평지, 희게 빛나는 강... 나를 압도했던 것은 거대함과 고요함이었다. 같은 자리에 서서 나처럼 말없이 산을 바라보았을 사람들과 그들을 받아주되 다만 스치듯 걷고 바라보는 것만 허락하는 자연. 하지만 산을 마주하며 허무함은 느끼지는 않도록 한다. 역사적인 등산가들이 겸허히 정상을 밟듯, 정복하거나 정복당할 것은 없다. 내 발자국은 바람이 불면 먼지처럼 날아가겠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다리가 생생하게 느껴지니까. 이 극단적인, 생명을 뛰어넘는 것과 아주 개인적인 인생 사이에서의 균형을 생각하며 산을 내려왔다.


삶이란 얻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경험하는 무엇이다. 삶은 당신과 함께, 또는 당신 없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수십억 년을 이어져 왔다. 당신은 단지 그 작은 조각 한 편을 목격하는 영광을 얻은 것이다. 거기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분주히 설친다면 당신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그 조각은 놓쳐 버릴 것이다.
- 상처받지 않는 영혼, 마이클 A. 싱어


Nikkaluokta 가는 길


집으로

산에서 내려와 사우나 시설을 여는 시간까지 앉아서 쉬다가 샤워하고 사우나를 했다. Fjällstation 시설은 생각보다 좋다. 24시간 단위로 시설 이용권을 살 수 있는데 공용 주방에는 간단한 조리도구와 충분한 식기가 있고 샤워시설과 사우나, 젖은 옷가지를 말릴 수 있는 drying room도 있다. 가격이 비싼 것이 단점이나 사우나 만으로도 가치 있는 소비라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고통받은 다리와 허리는 사우나에서 편히 쉴 자격이 있다. 사우나 밖으로 나오면 평소보다 100배 세게 다리에 쥐가 나는 것처럼 아파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A와 나는 서로의 절뚝거리면서 걷는 모습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날, 짐을 모두 지고 Nikkaluokta까지 가서 미리 예약한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에 늦지 않도록 5시간 전에 나가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F가 빨리 걷지 못할 것 같으니 한 시간 먼저 출발하겠다고 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것 같아서 내가 F와 같이 가고 A와 D는 텐트를 챙겨 따라오기로 했다. 그래서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부터 걸었다. 가방이 변함없이 죽을 것 같이 무거웠지만 집에 가는 길은 마음만은 도로시의 마법 신발을 선물받은 기분이었다.

기차 식당칸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전자렌지에 데워주는 조리된 파스타와 미트볼이 너무 맛있어서 우리 모두 감동을 받으면서 싹싹 긁어먹었다. 맛있고 따뜻한 음식은 이토록 소중한 것이었다... 식당칸에 앉아 우노 게임을 하고 놀다가 1편에서 말한 대로 좋은 침대에서 잘 자면서 왔다. 스톡홀름에 도착한 월요일에는 집에서 일했다. 수련할 때 일주일 정도 다리가 뻣뻣했던 것을 빼고는 다 괜찮았다.



스웨덴 어드벤처는 이렇게 끝난다. 누군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당분간 키루나라고 말할 것 같다. 내가 기차를 15시간이나 타고 러시아 친구와 브라질 친구와 십만보를 걸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 신기한 여행으로 스웨덴에 내적 친밀도가 크게 상승했다면 지나친 감상인가.

아무래도 정상에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워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할 때 다시 하이킹을 계획할 것 같다.




19th September 2019


#스웨덴 #스웨덴하이킹 #키루나 #케브네카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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