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살이 15
외국에 살면 향수로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나를 가장 강하게 공격하는 감정은 흥미롭게도 임시적 주거 상태가 만드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내가 임시 상태를 근본적으로 원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처음 스웨덴에 올 때 했던 계획은 2년짜리 비자를 최소 한 번 갱신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나머지는 의도적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계획이 없는 것이 계획'에 시간을 의탁하고 있다.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새로운 계획은 아직 없다.
스웨덴에 가는 준비를 하면서 한국에서 강한 사회적 그리고 인간적 고리들 몇 개를 끊어야 했는데, 돌이켜보면 삶의 많은 부분을 구성하고 의지했던 그 고리들을 끊는 일에 나는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처럼 직장과 나라를 동시에 바꾼 사람들을 보면 몇 년에 걸쳐 고민하고 조사한 끝에 가장 안전한 장소를 고르고 골라 이주한 사람들이 꽤 많다. 그들이 들인 고민의 깊이에 비해 당시 나의 결정은 거의 음료수 하나를 사는 것처럼 쉬워서 물러설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내가 원하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 하나로 나쁜 일이 일어날 경우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뒤늦게 깨달았을 때에서야 다른 사람들의 심사숙고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30대 여자/직장인/미혼] 상태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과 듣게 되는 이야기들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고 그래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리는 미래가 서로 비슷하고 나의 미래도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이가 들면서 주변 사람들이 계획된 미래에 나를 집어넣었을 때, 그리고 미래의 나를 스스로 시뮬레이션했을 때. 나는 '인생이 원래 그런 거지'라는 투의 말을 납득하기 힘들었고 반발심이 커졌다. 그래서 계획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계획하지 않음을 계획했다.
한국을 떠나온 나의 삶은 쉬워지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자유롭고 꼼지락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분이 주거 문제다. 나를 위한 본질적인 공간을 꾸리기 위해 필요한 바로 집.
나는 아파트를 셰어하고 있는데 스톡홀름에 앞으로 몇년 더 살게 될 때 계속 지금 집에 있을지 답을 못 내렸다. 돈을 빌려서 집을 사고 렌트비 대신 빚을 갚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스톡홀름의 부동산 흐름은 서울과 비슷해서 집값은 천천히 오르고 시내를 약간 벗어난 지역으로 새 집들이 계속 들어선다. 건물 주인, 집주인이 우리나라처럼 신 취급을 받지는 못해도 사람들의 충분한 부러움은 받는다. 아무리 이름난 복지국가라고 해도 당장 사람들은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외국의 월세의 삶은 정말 비싸다. 특히 1인 가구가 시내 중심과 멀지 않은 곳에 혼자 작은 스튜디오 하나를 빌리려면 월급의 큰 부분을 월세로 지출해야 한다. (집 보기에 대한이전 글 https://brunch.co.kr/@ggool/32) 나름 큰 회사에 다니는 내 월급으로도 스튜디오 하나를 빌리려면 월세 한 번마다 피눈물이 흐를 것이다.
이렇게 월세가 비싸고 더군다나 스웨덴이 세금 때문에 통장에 꽂히는 순수 연봉이 큰 나라가 아닌데, 타인과 하우스 셰어가 흔하지 않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파트너가 생기면 월세를 나눌 겸 일찌감치 같이 살기 시작하는 것 같지만 일부러 하우스 메이트를 구하지는 않는다.
평생 스웨덴에 살겠다면 연금과 사회 보장제도를 믿고 미친 척 저축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저축에 연연하는 게 구시대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획이 없는 자유를 계속 유지하고 혼자서 나의 안전을 지켜야 할 때 현금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은 없으므로, 저축을 포기하면서까지 월세를 낼 수는 없다는게 나의 결정이었다.
집에 대한 욕심, 어쩌면 욕망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정착에 대한 미련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질리도록 들어온 인생의 체크리스트들-내 집 마련, 차, 결혼, 출산과 육아- 대부분에서 벗어났어도 '정착과 안정'으로 귀결되는 '내 집 마련'만큼은 여전히 빨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처럼 느껴진다.
이미 더 이상 어디에서도 어린 편이 아닌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서 여전히 정착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나를 상상했을 때 느끼는 위화감은, 그것이 만약 사회의 학습 때문일지라도 나를 불안하게 하고 현재를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게 한다. 그래서 종종 답이 없는 고민으로 잠을 설치는데 스웨덴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자주 같은 고민을 반복하는 것 같다.
집의 문제는 집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아주 비싼 것을 사는 것과 언제든 이동할 수 있는 삶의 가치 사이의 충돌에서부터 시작된다. 더 깊이 들어가면, 현재의 삶을 잘 꾸미고 싶다는 욕심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준비 간의 충돌이기도 하다.
내 안의 이 충돌은 한국에서부터 시작되어 역사가 깊다. 한국에서는 해외에 갈 수도 있다는 계획 때문에 부피가 큰 물건을 사는 것을 극도로 피했고 집에 화분 하나 두지 않았다. 그런데 열망했던 이유로 살던 집을 정리하면서 어쩐지 조금 슬펐다. 배로 보낼 짐을 싸면서 예쁜 조명이나 테이블 하나 없는 것을 보고, 집을 내가 편안할 수 있게 꾸민 적이 없고 최소한의 구색을 맞춘 공간에서 잠만 잤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순간순간을 희생시켰다.
그래서 지금은 긴장을 풀고 장기적 임시 상태와 현재의 삶의 질 사이에서 더 나은 균형을 찾으려고 한다. 스톡홀름에서 방을 구하자마자 화분을 샀고 가끔 인테리어 소품이나 그릇 따위도 산다. 하지만 집을 살 결심이 생기려면 내 안에서 더 많은 충돌을 반복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한국에 있는 친구가 살던 집을 팔고 이사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계속 집을 한번 사면 처분할 수 없는 것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알고 있는 사실들은 종종 의식 한참 아래로 가라앉아버릴까? 한국에서도 사람들은 살던 집을 팔고 다시 사기를 반복한다. 스톡홀름에 집을 산다면 내가 계속 살 수도 있고 유지하면서 렌트를 주거나 다시 팔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금전적인 준비가 되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필요한 것은 마음의 준비다. 우리나라가 아닌 곳에서 부동산을 공부하고 온갖 스트레스를 견딜 가치가 있는지 - 에 답이 내려지면.
내 마음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금 나의 상태를 임시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할까. 임시 상태는 항상 불안정하고 부정적인 것이며 늘 정착이라는 결말로 가는 중간 과정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일까. 사회적 통념에서 어떻게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인생은 계속 변하고 늘 임시에 머무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늘 정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흥미롭다. 몸과 마음이 변하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듯, [30대 여자/직장인/미혼] 사람이 지구 어딘가에 잠깐 머무르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의 유일한 끝은 물리적 정착이 아니라고 용기를 보태 주어야 한다.
앞선 집에 대한 두서없는 생각들은 변화를 준비하고 받아들이며 균형을 잡는 방법에 대한 고민 아니었을까. 아직 집을 살 생각이 없고 큰 가구에 손이 안 간다면... 또 다른 큰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변화라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계획이 없었으니까.
19th Januar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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