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그리고 EM
같이 일하는 매니저들, 내가 느끼는 그들의 역할.
개발자가 다 같은 개발을 하는 것이 아니듯 매니저라고 다 같은 매니징을 하지는 않는데, '매니저'라는 이름이 가진 포괄성은 좀 남다른 느낌이 있다. 그 범위를 PM으로 좁히더라도 회사마다 팀마다 기대가 다른 것을 보면, 좋게 말하면 그 사람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정말 넓고 나쁘게 말하면 스탠다드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팀에는 PM(Product manager)와 EM(Engineering manager) 두 명의 매니저가 있는데 개발자가 다섯 명밖에 안 되는 규모를 생각할 때 팀 안에 매니저의 비중이 매우 높다. 내가 있는 부서는 팀이 자신들의 '제품'을 소유하고 그 제품들이 모여 큰 회사 인프라가 되는 구조라서, 채 10명이 안 되는 작은 팀들로 많이 쪼개져있고 이들 사이에 경계가 분명하다. 이런 팀이 다섯 개만 있어도 기본으로 팀 매니저 10명에다가 그들의 상위 매니저가 또 있으니 매니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셈이다.
여기서 우리 두 명의 매니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소개하면, PM은 서비스가 우리 팀이 속한 부서나 회사의 방향성과 잘 어우러지고, 고객님들의 의견을 듣고 잠재 고객님들을 만나면서 전략을 짜는 역할을 한다. 나는 사내 인프라를 만들기 때문에 고객님들은 사내 다른 개발자들이 되신다. 그의 업무 결과는 많은 미팅과 장문의 전략 문서이며 이것을 토대로 개발자들의 일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PM이 일을 지시하는 건 아니고 팀 전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결정한다. 그 논의 속에서 PM은 자신의 주력 분야인 서비스 리서치 결과를 피력하는 거다. 물론 개발자들도 고객님이 왕인걸 잘 알아서 보통 PM 의견대로 우선순위를 정하지만, 모두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얄짤없이 후순위로 밀린다. 그래서 우리 팀이 아직 개척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계속 파헤치고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발굴해서 '팀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만들어내는 게 팀이 그에게 요구하는 바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EM은 나도 지금 회사에서 처음 같이 일해봤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역할이다. 공식적인 EM의 역할은 팀의 delivery와 장애에 대한 책임이라고 하는데, 우리 팀에서는 개발자들이 건강하게 업무하고 커리어를 잘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분이 컸다. 지원자와 회사의 culture fit을 확인하는 면접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바로 EM이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을 정도로 팀 공간에 책상이 있긴 한데 보통 비어있고 가끔 회의나 개인 면담을 빼면 도통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비는 시간에는 잠깐 자리에 앉았다가도 금방 옆 팀에서 잡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책상에 앉아있던 아니던, 회사에 잘 마음을 붙일 수 있었던 데는 EM의 도움이 정말 컸다. 승진이나 피드백 모두 감사했지만 그런 도움은 이전 회사에도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셨고, 진짜로 안전함을 느꼈던 이유는 그에게 어떤 고민이라도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의 공격적인 의사소통 때문에 상처받고 같이 일하기 힘들어했을 때마다, 아무리 이름을 말하지 않고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해도 EM은 단번에 'ㅇㅇ가 그랬지?'라고 말할 정도로 팀 사람들의 성향을 꾀고 있었다.
나와 충돌이 있는 상대를 두고 매니저와 면담을 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매니저가 주는 신뢰 덕분인 것 같다. 그가 험담처럼 들릴 수 있는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당사자에게 험담을 바로 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EM이 불쑥 옆 팀을 찾아가 잡담을 하고 복도에서 마주친 아무나와 갑자기 커피를 마시는 일이 어쩌면 사람들과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약간 풀어져있을 때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없는지 물어봐주면서.
PM이나 EM뿐만 아니라 애자일 코치라고 해서 팀이 애자일 하게 굴러가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도 EM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즉흥적인 이야기를 나누는데 많은 시간을 쓰더라. 사람들이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있으면 지나가다가 불쑥 인사를 하고 지나가고, 누가 오래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면 꼭 들러서 휴가가 어땠는지 열심히 들어주고 간다.
전 회사에는 사람이나 문화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매니징 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한국 회사에서는 흔치 않은 포지션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그들을 보다 보면 신기하고 경외심마저 든다.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자기 전문 분야인 사람들은 무언가가 다르다. 단순히 친화력이 정말 좋아서 이 팀 저 팀에 아는 사람이 많은 것과 확실히 다르다. 사람을 매니징 하는 사람들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항상 관찰하고 필요하면 뒤에서 서슴없이 피드백을 준다.
계속 개발자로만 구성된 조직에 있다 보니 한 명 한 명의 최대 생산력이 최선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PM은 업무에 자기 영역이 뚜렷하니 논외로 하고) 회사에 왜 이렇게 매니저가 많은지 의문이었던 적이 있다. 아무리 EM이 delivery에 책임이 있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실무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며칠 자리를 비워도 개발자 1명이 빠진 것만큼의 업무에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니저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충격 완화장치 같은 존재들이다. 마치 뼈를 둘러싼 연골처럼 그들이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덕분에 실무를 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준비 없이 들이받지 않는다. 어떤 불화나 불만도 매니저를 통해 한 번 완화가 된 후 논리적인 해결책을 들고 상대를 찾아간다. 좀 느리지만 안전하며 성숙하다.
개인은 문제를 혼자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가 있으면 털어놓을 사람이 있고, 돌파구를 찾을 때 서포터가 있다. 서포트를 받음으로써 나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전락하지 않고 공동의 문제로 인정된다. 그리고 이 동의를 통해 개인은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의 중요성을 확인한다.
또 팀의 문화는 구성원들이 꼭 1/n 만큼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한 명이 확실한 책임을 지는 게 쉬울 수도 있다! EM이나 애자일 코치처럼 모두를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팀 문화를 해치는 사람이 솔직한 피드백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안 친해서, 아니면 너무 친해서, 아니면 직급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눈치만 보고 불만을 속으로 삭히지 않아도 된다.
/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다. 원래 쓰려던 내용은 따로 있는데...
28 July 2020
# 스웨덴 #해외취업 #개발자 #외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