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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발자 꿀 Jan 06. 2022

스웨덴의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다 4편

쿵스레덴 / 넷째 날, Alesjaure 가장 아름다운 풍경


/// Day4 : ~ Alesjaure ~ 보트로 6km 이동 후 12km 하이킹


아침. 간밤에 우리가 자는 동안 바로 옆에 텐트를 치고 큰 소리로 싸우던 사람들 이야기를 하면서 아침을 먹었다. 집에 아껴두었던 카누 커피스틱을 몇 개 가져갔는데 이 날은 전날 여파로 아침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으므로 달달한 커피를 호로록 하면서 기운 나는 하루가 되길 빌었다. 책에서 Alesjaure에서 출발하는 배가 있다고 해서 시간이 맞으면 타보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의 길을 떠난다. 우리가 가는 루트 중에 배를 두 군데에서 탈 수 있는데 Nikkaluokta와 Alesjaure다. 배를 타고 보는 경치가 정말 아름답다고들 하고 루트를 편하게 가로지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방파제 블록만 한 돌의 지역이 마침내 끝났는지 걸을만한 길이 이어졌다. Alesjaure 스테이션으로 가는 길은 전체 코스에서 손에 꼽히게 아름다웠다. 돌의 모양이나 지형이 계속 바뀌어서 구경하면서 걷는 재미가 있었고 특히 옆에 끼고 걷은 물줄기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샛물이었다가, 잔잔한 강이었다가, 회색 매끈한 돌로 만들어진 폭포이기도 했다. 돌에 앉아 물멍을 때리거나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뒤돌아볼 때 이 루트에서 멈춰서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진짜 하이라이트는 Alesjaure 스테이션 주변이다. 왼쪽으로는 에메랄드색 강이 S를 크게 그리면서 조용하게 흐른다. 나중에 들었는데 에메랄드색은 만년설이 녹은 물속의 미네랄이 햇빛을 받아서 만들어지는 색이라고 한다. 여태껏 투명한 물이나 아주 파란 물은 봤어도 이곳 만큼 에메랄드 같은 물은 본 적이 없다. 햇빛을 받아 군데군데 반짝이는 물은 속이 전부 보석으로 채워진 것처럼 아름다웠다.

강 오른쪽 언덕 지대에 닦인 걷는 길은 제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비스코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비옥해지는 땅을 증명하듯 키루나보다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색깔과 모양이 다양해진다. 손이 닿는 곳에는 지척으로 키가 허리까지 오는 나무들이 트레일을 뒤덮듯 빽빽하게 나있어서 나무 사이를 헤치면서 걸을 때 스치는 잎사귀 소리가 좋았다.


하지만 이곳의 경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광활함인 것 같다. 정말 정말 넓고 정말 정말 탁 트인 공간을 메우고 있는 산, 물과 하늘은 전혀 처음 보는 것이 아닌데도 크기만으로 압도한다. 인간 한 명으로 채울 수 없는 무한한 공간으로. 상상력을 뛰어넘는 영원함으로. 아무리 카메라로 파노라마 사진을 찍고 열심히 고개를 돌려봐도 쿵스레덴의 전신은 한 장면에 담길 수 없다. 전부를 느끼기에 내 시야가 너무 좁고 내 손이 너무 작다. 5일 동안 하루 종일 걸어도 나의 발자국은 쿵스레덴에 새겨진 실금 하나를 건드릴뿐이다.



문득문득 노란색으로 물든 트레일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Alesjaure 스테이션이다. 여기는 키루나와 아비스코 같은 관광지를 제외하면 가장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물자 구조가 어려운 지대를 지나 아비스코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상점도 크고 강가 방향으로 창을 낸 카페테리아가 있는데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 디저트도 구색을 갖추고 있다. 매일 커피를 마시는 중독자들에게는 대용량으로 대중없이 내린 필터 커피라도 반가운 법. 신발끈을 한껏 풀어놓고 앉아서 컵을 끝까지 채운 커피를 마셨다.

보트는 하루에 두세 번 다니는데 다음 타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기다릴지 그냥 계속 갈지 이야기를 했다. 보트를 처음 타자고 말한 것은 나였고 A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지나오면서 본 경치와 날씨가 좋아서 기다려서 보트를 타기로 했다. 나에게 언제 또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좋은 날씨에 배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보트는 따로 예약할 수 없고 시간 맞춰서 선착장에 나가면 탈 수 있다고 했다.



카페인을 충전하고 밖으로 나가 점심을 먹었다. 우리와 걷는 속도가 비슷한 듯 반복적으로 지나친 얼굴들이 보였다. 네덜란드 사람 모자가 우리가 앉아있는 자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Singi에서 처음 봤던 사람들이다. A는 언젠가 자신의 아들과 트레킹하는 로망이 있기 때문인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머리가 하얗게 샌 중년의 어머니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들이었고 네덜란드 사람답게 두 분 다 키가 컸다. 하이킹을 하기 전에 북유럽 큰 도시 중 하나로 이사를 했다고 했는데 헬싱키였는지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실 때 내 등 뒤에 앉아있던 남자, 여자 두 분이 언뜻 한국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실내에서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과 네덜란드 어머니가 한국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큰 개 한 마리와 같이 온 것을 보면 기차로 움직일 수 있는 거리에 사는 분들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보트를 기다릴 때 먼저 떠났다.


보트는 점심을 먹고 잠깐 쉬자마자 운 좋게 바로 탔다. A가 배를 부를 수 있는 최소 인원을 맞추려고 사람들을 모으는 소리를 듣고 잽싸게 여기 두 명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피얄라벤 관계자 한 명이 보트 선장님(?)에게 연락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핸드폰은 여전히 먹통이었는데 어떻게 연락하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지역망을 따로 쓰는 것 같다.

보트는 양옆으로 다섯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작은 통통배였다. 먼저 배낭을 내려서 앞쪽에 싣고 사람들이 타고, 개들도 용감하게 뛰어내려서 사람들 발 사이에 자리 잡았다. 우리와 배를 탄 사람들은 혼자 온 여자분 한 명, 큰 개 두 마리와 함께 다니는 핀란드 커플, 스웨덴 커플이었다. 핀란드 남자분은 피얄라벤 클래식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고 다리가 아파서 보트를 타기로 했다고. 우리는 혼자 온 여자분 반대편에 앉았다. 선장님이 배에서 스웨덴어와 영어를 섞어 쓰면서 이것저것 설명해주셨는데 물 색깔도 그때 들은 이야기 중 하나다. 배에 탄 사람 중 한 명이 선장님께 Sámi냐고 물어봤는데 정확한 말은 피해가면서도 맞다는 뉘앙스로 대답하신 것 같고 나중에 A와 Sámi 인 것 같다고 다시 이야기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스웨덴에 살면서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이 없어서 신기한 경험이었다.



배에서 보는 풍경은 기대한 대로 아름다웠다. 가까이서 수면을 들여다보니까 티끌 없이 깨끗해 보이지만 투명하지 않고, 에메랄드색 돌을 가득 채우고 물을 찰랑찰랑하게 부은 큰 어항 속을 들여다보는 같았다. 강변을 따라 난 하이킹 트레일로 줄을 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데 이 날은 풍경보다도 배에서 들었던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기억난다. 웅웅웅 하는 모터 소리, 바람 소리, 보트가 물을 가르는 소리, 큰 허스키가 발 밑에서 숨을 쉬는 소리, 모터 소음 때문에 살짝 커진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 핀란드 남자의 약간 신기했던 억양. 그동안 귀가 조용함에 익숙해졌는지 며칠 만에 듣는 소음과 시끄러운 말소리가 귀에 박혔다.



보트로 6km를 이동하고 다시 걷는다. 강을 따라 걸을 때는 경치도 좋고 평지에 흙길이라서 신나게 걸었다. A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가족 이야기, 책 이야기,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중간에 오래 쉰 탓인지 우리 둘 다 컨디션이 괜찮았다. 우리는 햇수로 4년째 같이 일하고 있는데 A는 내가 스웨덴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스스럼없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다.

하지만 역시 하루도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산골짜기를 지나는 구간부터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Tjäktja의 뒤를 잇는 지옥 구간의 시작! 정확한 지형을 모르겠는데 산맥을 완만하게 따라 걷도록 난 길인 것 같다. 다행히 경사는 없었지만 거짓말처럼 우리의 사랑스러운 돌이 길을 채우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Tjäktja 만큼 지루한 길이었다. 양옆으로 벽처럼 버티고 선 회색의 산뿐이고 심지어 샘물도 흔치 않은 지역이었다. 아침부터 지나온 길이 말도 안되게 아름다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칙칙해 보이고 지루했는지도. 내가 다시 말을 하는 동시에 걸을 수 없는 상태로 돌아갔기 때문에 우리는 한동안 그저 걷기만 했다.


쿵스레덴은 강이나 호수 근처를 따라 걷기도 하고 곳곳에 샘물이 많아서 식수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필터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흐르는 물을 받아서 그대로 마셨다. 하지만 Tjäktja 지역이나 Alesjaure 뒤쪽은 가는 길에 마실 수 있는 물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스테이션에 설치된 커다란 물통에서 미리 물을 받고 출발하는 것이 좋다. 물이 상대적으로 귀한 지역에 있는 스테이션이라면 커다란 정수기ㅎㅎ가 주변에 있을 것이다.


마른 음식에 지겨워진 우리는 Alesjaure 에서 인스턴트 라면을 샀다. 스웨덴 마트 어디를 가도 큰 통에 잔뜩 쌓여있는 작고 얇은 라면인데, 친구에 의하면 포장지에 쓰여있는 Samyang이 바로 우리나라 회사 삼양이라고 한다. 일반 마트에서 파는 인스턴트 아시안 음식 재료는 궁금해서 샀다가 실패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저 라면은 항상 지나쳐도 구매할 시도도 안 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는 라면을 가방에 넣고 걷고 있었을 때 갑자기 A가 우리가 산 라면을 평소에도 먹냐고 물어보더니, 우리와 일찌감치 헤어진 D가 그 라면을 얼마나 좋아하고 자주 먹는지 말해줬다. A는 맛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D가 좋아해서 하이킹을 가면 삼시 세 끼를 그 라면으로 먹을 정도라면서. 한국에서 인스턴트 누들을 많이 먹는 줄만 알지, 한국이 라면 신메뉴 개발에 미친 나라라는 것은 몰랐던 A는 나도 D처럼 스웨덴 마트 버전 라면을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우리나라 내수 라면 시장은 차원이 다르다 보니. 걸으면서 한참을 우리나라 라면이 얼마나 다양하고 한국인의 식문화에 큰 부분인지 한참을 이야기했다. 나는 크게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럼에도 내 입맛에 라면이 인처럼 박혀있는 것은 확실하다. 유럽에 살고 있는 지금도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 꼭 라면을 끓여 먹는다. 여독을 내려주는 음식으로 라면만 한 것이 없다.



지옥 구간을 넘겨 땅이 푸릇푸릇해지고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지역으로 넘어왔다. 사방으로 가리고 있던 산이 사라지고 잔디가 깔린 평지가 나타났다. 이제 슬슬 캠핑 자리를 찾아야 할 시간이 되었고, 어제처럼 피얄라벤 클래식 체크포인트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산줄기는 빠져나왔지만 아직 내려가야 할 거리가 한참인 듯 길은 평지와 경사를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여기는 경사 가파르기가 손에 꼽혔던 것 같은데, A가 먼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면 몇 발 자국 안에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땅이 절벽처럼 꺼졌다. 항상 하루의 마지막 3km가 정말 길고 힘들다. 전날은 캠핑을 할 장소가 보일 때 까지 어쩔 수 없이 걷느라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 짤 수밖에 없었다면, 이날은 지척에 물소리가 들려서 다 온 줄 알았다가 끝이 나지 않는 경사 때문에 순간순간 좌절하면서 걸었다. 이때쯤 되면 순수한 정신력으로 걷는다. 내쉬는 숨 하나하나에 의지해서 질질 끌리는 다리를 부추기면서…


우리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적당히 나무가 있고 계곡이 근처인 산속의 예쁜 캠핑 구역이었다. 미리 자리를 잡은 텐트들이 많았는데 나무 기둥에 텐트 입구를 묶어서 차양을 만들거나 나무 사이에 빨래를 너는 등 나무 사이에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텐트들이 귀여웠다. 피얄라벤 클래식 포인트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어제 만났던 네덜란드 남자분과 보트를 같이 탔던 여자분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저녁으로는 라면을 먹었다. 많이 피곤하면 냄비 설거지하기 귀찮아서 물 부어 먹는 마른 음식을 먹었을 텐데. 이 날은 최장 거리 24km를 걸었지만 완전 소모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메뉴를 바꿔본다.  라면은 매운맛이 거의 없고 간장이나 굴소스 비슷한 맛이 나는 소스가 자작한 미고랭 같았다. 여기를 왔던 한국분들의 가방 속에 라면이 있었을까? 사실 하이킹을 오기 전 만났던 한국 친구가 라면을 가져가라고 했을 때 시큰둥했는데 애매한 맛이 나는 라면(?)을 먹고 있자니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길 중간에 산 어중간한 라면을 먹어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긴 했다.



마지막 한 편 남았네요.

#스웨덴 #쿵스레덴 #스웨덴하이킹 #스웨덴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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