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 셋째 날, Tjäktja를 넘는 지옥 코스
오전 열한 시쯤 상점이 있는 첫 번째 스테이션인 Sälka(발음은 '셀카'에 가까움)에 도착해서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콜라와 과자부터 샀다. 콜라 캔에 'Delicious & Refreshing'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이때만큼 깊이 공감한 적이 있었을까.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심지어 실온에 있던 미지근한 캔이었는데도 3일 만에 마시는 도시의 맛은 정말 맛있고 상쾌했다.
쿠키를 씹으면서 가방을 정리하는 사람들, 상점에서 산 맥주나 콜라를 마시는 사람들, 개에게 물을 주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자연과 한 몸이 된 생활로 꼬질꼬질함이 묻어나는 차림새였지만 휴식을 즐기는 얼굴은 하나같이 편안해 보였다. A가 근처에 앉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서 어디서 왔고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마 A는 우리가, 사실 그녀가 전적으로 계획한 일정이 현실적인지 궁금한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케브네카이제를 떠나 처음이었는데 여기서 얼굴을 본 사람들을 다른 데서도 계속 만났다.
책에서 읽은 대로 Sälka를 지나면 본격적인 돌무덤, 방파제 콘크리트 블록 위를 걷는 듯한 길이 한참 계속된다. 방파제 블록은 매끈하기라도 하지. 발을 아무 데나 디딜 수 없게 제멋대로 깎이고 얽혀있는 험한 길이었다. 계속 달리기를 하는 것 같이 숨이 차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추기 전까지 죽을 둥 살 둥 걸었다. 하도 지쳐서 이 날은 길에서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하루 종일 구름이 껴서 흐리고 포근한 날씨였다.
걸음에 집중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서 오히려 명상의 상태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보다 빨리 걷는 A는 내 앞에 가다가 가끔 뒤돌아서 나를 기다려주었고 중간에 서서 물을 마시고 간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면 우리 사이에 거의 말이 없었다. 이맘때의 나는 회사에서 일을 거의 못 할 정도로 머리 어디가 고장 난 것 같이 엉망인 상태였다. 하지만 하이킹은 그런 고민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게 체력적 한계로 밀어 넣었다. 한계까지 거의 밀려서도 계속 몸을 움직이려면 내딛는 걸음 하나, 내뱉는 호흡 한 번에 집중하게 된다. 이런 집중을 계속하면서 순간에 머무르다 보면 마음만은 굉장히 편안해져서 작은 생각 하나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정 되는 감정을 아주 오랜만에 느꼈다. 나중에 이런 기분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기운이 소진된 상태로 걸으면 숨을 쉬면서 만들어지는 에너지만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 같다. 충전된 배터리는 끝났고 자전거를 타듯이 발을 구르는 만큼만 앞으로 가는 것처럼. 그러면 몸에 순환이 빨라져서 오히려 생각을 맑게 하는 것 같다.
계속 눈앞에 온통 산 아니면 돌 뿐인 길을 걷다가 큰 호수 주변에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겨우 찾아서, 혼자 물을 끓이던 키 큰 아저씨 옆에 앉았다. 가방에 주황색 플래그를 보니 피얄라벤 클래식으로 오신 분이었다. 우리가 신발을 벗는 모습을 보다가 본인이 앉아있던 돌이 발을 담그기 좋다고 양보해주고 물아래가 이끼 때문에 미끄럽다고 일러주셨다.
그 분과 코스를 이야기하면서 피얄라벤 클래식에서 정해주는 베이스 캠프 장소가 있고, Tjäktja(셱티야)까지 돌 때문에 텐트를 설치할 수 없어서 산을 완전히 넘어가야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제일 높은 지대라는 것만 알고 캠핑 장소 생각을 못한 우리는 하루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산을 넘기로 했는데 이때가 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점심으로 직전 스테이션에서 산 음식을 먹었는데 너무 짜서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식사였다.
그리고 또 걷는다. 점점 산으로 접근하면서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는데 한참 걷다가 뒤돌아보면 내 발로 걸어온 길이 경사져 펼쳐지는 풍경에 잠깐 넋을 놓았다가 앞서 가는 A의 등을 보며 다시 움직인다. 또다시 시작되는 방파제 아스팔트 같은 구간에서 우리 앞에 여성 여러 명이 큰 바퀴가 달린 휠체어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원래 휠체어에 앉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여성분은 누군가에게 업혀있었고, 빈 휠체어는 앞뒤에서 여러 명이 끌고 밀면서 멀쩡한 다리로도 쉽게 걷지 못하는 길을 가고 있었다. 휠체어가 앞으로 움직일 때마다 바퀴가 크게 구르면서 덜컹하는 소리가 났다. 돌 하나하나가 난관인 듯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모두 나처럼 엄청 무거운 각자의 배낭을 메고 있었고, 배낭을 멜 수 없는 사람 몫의 가방은 두 명이 어깨끈을 하나씩 잡고 큰 짐처럼 옮기고 있었다. 한참 앞에는 대포 카메라를 들고 서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분이 휠체어를 끄는 사람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자기는 포토그래퍼인데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우리 등 뒤로 그녀들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아비스코나 키루나와 달리 사람이 살지 않고 여행자들이 사시사철 찾지 않기 때문에 쿵스레덴을 걸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길만 닦여있는 구간이다. Tjäktja의 본 구간으로 들어가는 듯 갑작스러운 급경사가 있었는데 계단은 당연히 없고 순전히 등산스틱에 의지해서 타야 하는 비탈길이었다. 배낭이 몸과 따로 움직이지 않게 허리 벨트를 있는 대로 조이고 등산스틱을 땅에 찍으면서 남은 힘을 쥐어짜면서 올라갈 때에 힘들고 무서워서 허리를 펴지도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힘이 넘치는 상태로 맞닥뜨렸다면 정복하는 마음으로 올라갔을까. 나는 이미 6시간을 걸은 상태였기 때문에 진이 빠져있었다.
이런 무서운 길을 2년 전에 케브네카이제에 갔을 때도 걸은 적이 있다. 그때와 다른 것은 길이 완전히 말라서 미끄럽지 않았고 등산스틱이 있었다는 것. 이 부분을 쓰면서 그 길이 서리로 미끄러웠으면 어땠을지 상상해보니 끔찍하다. 등산스틱은 힘을 분산시켜주는 훌륭한 친구이니 장기 트레킹을 간다면 꼭꼭 챙기시길.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올라가 마침내 뒤를 딱 돌아봤을 때의 기분이란. 광야(SM이 요즘 좋아한다는)가 발 밑에 있고 내가 직접 밟아온 길의 반대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아지면 땅이 끝나고 시작되는 하늘. 한눈에 담을 수 조차 없는 그런 길. 몸 하나로 60km 남짓의 길을 여태까지 걸었다고 생각하면 내가 직접 했으면서도 믿기가 힘들다. 삶의 많은 순간 나의 한계를 의심하지만 약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충분히 강한 에너지가 몸 안에 돌고 있는 것을.
앞선 나의 엉망이 된 상태와 쿵스레덴 트레킹이 운명이었다면, 나는 에너지가 초기화된 채로 길을 시작하여,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내 안에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몸소 실감하는 여정이지 않았을까.
쿵스레덴의 가장 높은 지점을 향해 경사 또 경사, 오르막 또 오르막을 걸으면서 A와 아까 마주친 휠체어를 끄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힘들 때마다 그녀들을 생각하자고 했고, 집에 돌아가 사진이나 기사가 올라왔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그들은 Astrid Finne Skovbakke라는 뇌성마비 환자와 팀이었는데 피얄라벤 공식 계정에 의하면 110km 트레킹을 완주했다고 한다.
산을 한참 오르다 보면 Tjäktja 꼭대기-쿵스레덴에서 가장 높은 곳- 오두막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은 산 정상에 도착한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나 있을 뿐 STF 스테이션이 아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기만 했던 산등성이가 어느샌가 눈높이에서 멀지 않았다. 항상 마지막 1~3km가 정말 힘든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마음을 비우고 걷는 편인데 눈앞에 오두막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자꾸 얼마나 걸어왔는지 확인하게 되더라. 하지만 산은 눈에 보이는 대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오두막이 보이기 시작하고도 다리가 무감해질 만큼 걸어서야 정상에 도착해서 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을 때 먼저 출발했던 키 큰 아저씨를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네덜란드에서 피얄라벤 클래식 때문에 스웨덴에 처음 오셨다고 했다. 도착해서 이틀인가 스톡홀름을 관광하고 키루나에 오셨다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하루에 20km를 걸었다면서 연습이 엄청나다고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이킹이 끝나고도 아비스코에서 바로 안 돌아가신다고 했으니까 되게 길고 여유로운 여름휴가를 보내시는 것 같았다.
다음 포인트를 이야기하다가 네덜란드 아저씨가 옆의 산 봉우리에 고여있는 얼음 위를 걷는 순록 무리를 발견했다. 콩알만하게 보이는 동물들이 느리게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분의 가방에서 망원경이 나왔고...! 쿵스레덴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순록들이 얼음 위에서 노는 모습을 망원경을 통해서 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정상을 내려와 진짜 Tjäktja 스테이션으로 걸어가는데, 미리 들었던 대로 전부 돌 뿐이라서 캠핑을 할 장소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삼일 동안 피얄라벤 클래식과 함께 걸어보니 회사에서 캠핑하기 좋은 장소를 체크 포인트로 정해놓는 것 같았다. 그곳에 스태프들이 머무르면서 참가자들한테 아침을 준다던가 음식이나 가스를 보급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점점 흙길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했지만 너무 탁 트여서 바람이 많이 불거나 물과 너무 멀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물로 하룻밤은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더 나은 곳에서 캠핑을 하려고 피얄라벤 체크 포인트가 나올 때까지 계속 걸었다.
다음 피얄라벤 체크 포인트는 Tjäktja 스테이션을 지나서 있다는 화살표를 보고 1km를 걸었는데도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가 나오지 않았고 더 걸을 수 없을 만큼 너무 피곤해서 누군가 미리 텐트를 치고 있던 평지에서 하루 자기로 했다. 여기도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가스버너에 불을 붙이느라 엄청 큰 돌을 여러 개 세워 불을 지키는 등 끝까지 쉬운 것이 없었다.
이 날은 총 22km를 걸었다. 다음날 더 많이 걸었지만 하루 종일 돌에 시달려서 전체 여행에서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기록적인 하루였다. 자려고 누웠을 때는 또 비가 왔다. 누워서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처음에는 피얄라벤 클래식 등록비가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돈을 낼 만하다는 이야기를 했었나. 그리고 낮 동안 비가 안 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이틀 치 일기를 쓰다가 텐트 사이로 땅에 떨어지는 비를 보다가 잠들었던 것 같다.
13 Novembe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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