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 첫째 날과 둘째 날, Kiruna부터 Singi까지
1편에서 이어지는 글.
한 번 해봤던 동일한 코스. 키루나 기차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니깔루옥타까지 이동한 다음 케브네카이제 스테이션까지 걸어간다. 지난번의 니깔루옥타까지 가는 버스를 늦은 시간으로 예약해서 하이킹 시작이 늦어져 깜깜한 시간까지 하이킹을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이번에는 기차에서 내려 바로 버스를 탈 수 있게 예약했다. 두 번 경험해보니, 버스까지 시간이 넉넉하면 키루나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지만 당일에 케브네카이제까지 도착할 계획이라면 (대다수가 이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일찌감치 걷기 시작해서 밤에 제대로 쉬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버스에서 내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든든하게 먹은 다음 한시쯤 출발했다. 니깔루옥타에 있는 레스토랑은 점심 메뉴는 두 개로 정해져 있는데 디저트 종류가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들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식사를 끝내고 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씩을 먹고 있었다. 디저트와 커피는 하이킹을 끝내는 사람과 이제 길을 떠날 사람 모두에게 마다할 이유가 없는 즐거움일 테니까.
키루나 기차역에서 사람들이 자주 사 먹는 피자집이 있다고 하는데 위치를 몰라서 못 먹었다. A가 작년에 혼자 왔을 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한 명은 짐을 지키고 다른 사람이 후다닥 피자를 사러 뛰어갔다 오는 것을 봤는데 자기는 혼자라서 너무 아쉬웠다고 꼭 먹고 싶어 했으나... 우리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피자 박스에서 구전 속의 피자집이 존재한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었다.
키루나에서 우리가 올해 피얄라벤 클래식과 같은 날 출발한다는 것을 알았다. 피얄라벤 클래식은 스웨덴 아웃도어 브랜드 피얄라벤에서 진행하는 아비스코-키루나 코스 하이킹 연중행사인데 순식간에 신청 접수가 끝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피얄라벤 클래식 때문에 스웨덴에 오는 분들이 있는 것 같더라. 다만 올해는 국외 여행이 힘드니까 스웨덴에 살거나 아니면 스웨덴과 가까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 같다.
D는 드론을 날린다고 길 초입에 남았고 나와 A는 걷기 시작했다. 같은 19km 길을 두 번째 걸으면 쉽냐고 묻는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므로, 버스는 제대로 예약했지만 가방을 무겁게 싸는 실수를 다시 저질렀고 매 걸음마다 짊어지고 있는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좋은 가방이 무게를 잘 잡아주고 제대로 된 신발을 신었고 등산스틱도 있어서인지 처음만큼 정신이 혼미하게 힘들지는 않았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기차에서 읽기 시작한 아잔 브람 스님의 강의를 기록한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라는 책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하지만 수행에서의 바람이나 좋은 일에 대한 미세한 욕망도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바라는 마음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원인은 바라는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말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5km만 더 걸으면 된다'라고 바라지 않고 '걷다 보면 언젠가 끝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앞으로 더 가야 하는 길이를 계산하기 시작하면 실제로 걸은 시간을 내 체감 시간이 앞질러서 생각보다 적게 왔다고 생각하고 3km가 6km처럼 느껴진다. 이런 멘탈 플레이는 남은 거리를 카운트하는 순간마다 예외 없이 나타났다. 그래서 인지의 장난에 동조하지 않고 단순하게 그냥 계속 걸었고 하이킹 내내 반복적으로 연습했는데 5일 동안 일정하게 걷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믿는다.
나보다 먼저 하이킹을 시작한 두 명 중에 무릎보호대를 일러준 친구 말고 나머지 한 명은 며칠 전에 아비스코에서 시작하여 내가 케브네카이제 스테이션에 도착했을 때 이미 두어 시간 일찍 와있었다. 리셉션에 도착했더니 자기 일행하고 이야기를 하던 친구가 보여서 냅다 이름을 불렀다. ㅎㅎ 평소에도 종종 보던 얼굴인데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 아비스코와 키루나 시내를 빼면 데이터를 쓸 수 없는 지역이라서 서로 동시에 연락을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미친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가 저녁을 먹고 다시 떠나면서 아주 짧은 조우로 끝이 나고, 우리는 공용 주방에 앉아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으면서 떠들다가 하루를 마무리했다.
A가 침낭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D는 이미 텐트를 떠난 뒤였다. 짐을 정리하고 공용 주방에서 아침을 먹은 후 처음 가보는 길로 발을 내딛는다. 구름이 조금 있었지만 맑은 날씨였다. STF 스테이션 뒤쪽으로 시작되는 산의 발등을 타다가 봉우리들을 완만하게 돌아가도록 나있는 갈래길을 따라 걷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산 봉우리들, 그 사이를 지나는 끝이 없는 길, 하늘. 산은 큰 구름을 빗겨 통과한 햇빛으로 얼룩덜룩한 까만색인데 산이라기보다 엄청나게 큰 돌이 깨져서 땅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어떤 식물도 자랄 것 같지 않은 척박하고 매끈한 표면이었다.
우리와 같은 루트를 걷는 피얄라벤 클래식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주황색 플래그를 가지고 다닌다. 사람들은 배낭 뚜껑이나 등에 달고, 개들은 하네스에 붙여서 옷처럼 입고 다녔다. 개들이 생각보다 진짜 많아서 하이킹 내내 그 친구들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큰 친구들부터 다 커도 강아지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작은 친구들까지 다양했다.
우리는 첫 번째 목적지인 Singi에 오후 한 시쯤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찬물에 발을 식히면서 쉬었다. A가 꼭 챙기라고 말했던 슬리퍼는 물 근처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등산화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쪄진 발을 물에 담그면 목 끝까지 차있던 열기가 다리를 타고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는 물기가 마를 때까지 슬리퍼를 신으면서 기다리기. 발을 물속에 밀어 넣고 온천탕에 막 들어간 사람처럼 으으으 떨면서 기다리는 시간은 단연코 하루 중 최고의 순간이었다.
나는 걷는 방법을 진짜 진짜 많이 생각했다. 평소에 조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장기 하이킹이 처음이었으므로 내 체력으로 무작정 걷기에 물리적으로 너무 먼 여정이었다. 어디에나 지나치게 많은 돌을 휙휙 넘어 다닐 만큼 다리가 길지 않은 점도 솔직히 문제였다 흑흑.
그래서 생각했던 에너지 효율적인 걷기는 한 발, 한 발 집중하고 허벅지(다리에서 제일 큰 근육)를 써서 다리를 움직이기. 그리고 요가 수련할 때처럼 호흡을 들으면서 걷기. 세 걸음 동안 숨을 마시고 세 걸음 동안 숨을 내뱉는 리듬을 유지하기. 숨을 들으면서 집중해서 온 몸을 써서 걷고 몸보다 마음에 집중. 모든 운동은 온몸 운동이면서 정신력 싸움이라고 하니까 열심히 그 법칙대로 걸었다.
아침에는 몸 상태가 우리 둘 다 괜찮았는데 시간이 날수록 눈에 띄게 피곤해졌다. 역시 10kg가 넘는 가방을 메고 돌길을 걷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A는 원래 등 결림이 있던 부분이 아프기 시작했고 나는 오른쪽 골반이 배낭 허리 벨트에 쓸려 멍이 생겼다. 멍이 일주일 동안 얼마나 세게 들었는지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아직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걷는 요령이 없어서 몇 배로 힘들었던 날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서 Singi 스테이션에서 조금 더 걸어서 일찍 텐트를 쳤다. 텐트를 치자마자 A는 낮잠을 잤고 나는 밖에 앉아서 다운 받아온 노래를 듣고 쿵스레덴 안내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때웠다. 앞으로 물이 흐르는 평지였는데 가만히 앉아있다가 처음으로 모기를 봤다. 근처에 우리보다 먼저 자리 잡은 남자 한 분은 내가 멍 때리는 동안 텐트 안팎을 왔다갔다했다. 한참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분이 강에서 수건을 두르고 후다닥 걷는 것이 보였는데 내가 고개를 숙인 사이 재빠르게 목욕을 하신 것 같았다.
주황색 깃발의 무리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꽤 늦은 시간에도 계속 사람들이 지나갔다. 책에 의하면 다음 코스는 전부 돌밭이고 산을 통과하기 때문에 전체 코스에서 가장 높은 구간을 지난다고 했는데, 다른 여행자들은 그 코스를 쉽게 넘기 위해서 오늘 평지 구간을 미리 돌파하는 듯 보였다.
A가 일어나서 같이 저녁을 먹고 텐트에 누워 내가 다운받아온 팟캐스트를 들었다. 정말 인터넷을 쓰지 못하리라고 믿지 않았던 A는 책도, 아무것도 없어서인지 굉장히 지루해했다. 핸드폰을 많이 보는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심심해할 줄은 몰랐어서 좀 신기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를 듣는 중에 비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텐트를 심하게 흔드는데 비가 멈출 것 같지 않았다. 보다 못한 A가 중간에 나가서 텐트를 바닥에 박은 못에 매단 줄마다 큰 돌을 하나씩 올리는 공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A가 열어둔 텐트 문 사이로 보이던 무지개. 그날의 하이라이트였고 마치 다음 날의 행운을 빌어주는 것 같았던, 해가 지기 시작하는 노랗게 물든 산에서부터 크고 선명하게 올라오던 무지개.
팟캐스트를 끝까지 듣고 빗방울이 텐트를 토독토독 때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다가 눈을 감았다.
다음 글로 이어진다.
3 Septembe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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