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비밀번호를 세 번 잘못 입력해서 카드가 막혔다.
은행에 득달같이 전화를 했더니 카드가 막히면 무조건 새로운 카드를 신청해야 한다고 하길래 바로 그렇게 했다. 전화를 할 때만 해도 카드를 새로 받는 일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지만. 하루 뒤에 배송을 시작했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2-3일 안에 도착해야 했을 카드가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다시 은행에 전화를 했다. 거기서는 요즘 카드 배송이 지연되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만. 뭐… 어느 정도 예상된 대답이었다. 또 기다림. 총 1.5주를 기다렸는데도 카드가 오지 않아서 다시 전화를 했고, 이번에는 배송 중에 없어진 것 같으니 기다리고 있던 카드를 블락하고 다시 카드를 신청하도록 도와주었다.
그 사이에 두 번의 주말이 지나갔다. 회사에서 점심을 사고 친구들을 만날 때는 대신 결제를 부탁하고 돈을 보내 주거나,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던 현금을 들고 마트에 가서 몇 년 만에 현금으로 장을 보았다. 스웨덴에서 많이 쓰는 Swish라는 모바일 결제/송금 앱 서비스로 결제할 수 있는 가맹점도 꽤 많아서 다행이었다.
체감상 스웨덴은 무현금 결제가 99.9%에 가까워 사람들 지갑에 현금이 없다. 어찌나 카드 결제에 익숙해졌는지 현금 없이 다른 유럽 나라에 여행을 갔다가 카드를 안 받는다고 해서 난감했던 적도 많다. Cashless 사회에서 카드가 없어지니까 정말... 너무 불편했다. 여기는 신용카드 혜택이 크지 않아서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고 체크카드 하나만 쓰고 있었는데 그 유일한 결제수단이 없어지다니. 더군다나 카드를 새로 받는 데 일주일 넘게 기다리고 있다니. 내 이름으로 만든 체크카드를 처음 쓰기 시작한 이래로 지갑에 카드가 없는 것은 최소 지난 10년 동안 처음이었을 것이다.
너무 답답해서 중간에 신용카드를 하나 만들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TransferWise나 Revolut 같은 서비스에서 애플 페이용 카드를 바로 발급해주니까 써보려고 했는데, 지금 비자가 만료되고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스웨덴에서 내 신분/거주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인증을 거절당했다. ㅎ 속이 터지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음 월요일. 주방에 앉아있는데 현관문으로 편지봉투 여러 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그냥 신문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닌 것이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 봉투들에는 바로 전날 전화로 블락한,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던 새 카드와 비밀번호가 들어있었다. 손에 카드를 꼭 쥐고 은행에 전화를 걸어서 기다리던 카드가 도착했는데 블락을 풀어줄 수 없는지 물어보니 안 된단다. (여기서 무음으로 소리 지름) 최대 3일이 걸려야 하는 카드 배송이 거의 이주가 되도록 오지 않아서 블락했다면, 이것은 내가 참을성이 없는 탓인가? 짜증이 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블락하지 않은 두 번째 카드가 안전하게 집으로 도착하여, 총 14일 만에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현대사회 시민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스웨덴에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순간들에서 기다리게 된다. 모든 종류의 속도가 최적화되어있는 나라에서 온 나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천지인데, 결제수단을 우편으로 며칠씩 기다려서 받는 것부터 택배 배송, 은행 업무, 매일 맞닥뜨리다 자잘한 서비스 전부 애당초 기대 수준을 0.5배속으로 맞춰놔야 속이 덜 터진다. 기다림의 미학도 하루 이틀이지, 그것은 그저 생활의 일부일 뿐 미학일 수 없다. 오랫동안 기다려서 힘겹게 받은 신상카드로 물건을 결제하는 즐거움이 새로워봤자 얼마나 새롭다고.
그래서 이번의 '카드 사건'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데, 돈을 더 내고 빠른 배송으로 결제했는데 택배가 늦게 도착한다던가 (그리고 따로 환불 없음), 같은 날에 덴마크에서 하나 스웨덴에서 하나씩 물건을 샀는데 덴마크 국경을 넘어온 택배가 이틀 더 먼저 도착한 적도 있고, 배송 중에 물건이 없어져서 환불해준다고 했는데 한 달이 걸리는 등. 다행히 매번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건을 주문해서 전달받는 과정이 전반적으로 느리고 가끔 오락가락한 것은 확실하다.
한국에 살던 스웨덴에 살던 스타벅스 아아를 마실 수 있고, 자라와 H&M에서 변함없이 옷을 사고, 똑같은 아이폰을 쓰는데도, 서비스가 굴러가는 사회의 한 단면이 이다지도 다를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 국제화를 통해 많은 것들이 비슷해졌다지만 껍데기를 살짝 들춰보면 어디는 저녁에 핸드폰으로 장을 보면 다음날 새벽에 도착해있는 반면, 다른 어딘가에서는 주말에 상점들이 일찍 닫기 전에 시간 맞춰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시스템이기 때문에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적응하고 사는 것이다. 최대한 미리 계획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수밖에. 그래서 주변 스웨덴 사람들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사는 듯한데 그들을 지켜보는 나는 매번 '이렇게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라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이렇게 삶이 한가롭고 유유자적할 수 있다는 것이 몇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신기하다. 이것 또한 해외 생활을 하면서 당연했던 것이 당연해지지 않고 상식이 뒤틀리는 경험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는 경험 중 하나겠지.
이 사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반적으로 느긋한 분위기가 있고 당연히 chill 한 문화가 좋게 느껴질 때도 있고 나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주로 내가 돈을 내는 입장이 되면 속이 터지는 것 같긴 하지만 나 또한 고용되어 월급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느긋한 환경이 노동자에게 주는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100% 동의하지는 않음) 그러니 무엇이 더 옳은가, 무엇이 더 좋은가 묻는다면 바로 대답이 안 나온다. 배송을 예로 들어 빨리 받아야 하는 것’만’ 빨리 받을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빠름이나 중요함의 기준은 순전히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 정의를 내리면서 이기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카드가 늦게 와서 짜증이 있는 대로 났지만 주변에 도와줄 사람들도 있었고 현금도 있었기 때문에 배송이 예상보다 늦어졌다고 해서 내가 대단한 손해를 보았다거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니까. 하필 그때 배송하시는 분들이 많이 휴가를 간 시기였을 수도 있고, 진작 비상용 카드를 하나 더 만들지 않은 나의 잘못일 수도 있고. 당시에는 심적으로 괜찮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점심시간마다 여즉 오지 않는 카드를 반찬삼아 씹으면서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거북이 배송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묻는다면, 편리하지 않은 카테고리와 나쁜 서비스의 카테고리는 살짝 다른 것 같으니 꼭 나쁜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갈 때마다 배송과 배달 속도에 놀라고 온다. 정작 한국에 살 때는 집으로 배송을 시킨다거나 또 배달로 음식을 사 먹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우리나라에 있는 한정된 시간 동안 볼일을 끝내야 하다 보니 필요한 것들을 발품 팔아서 사기보다 택배로 받는 일이 전보다 많아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지인의 집에서 음식을 시켜먹으면서 시간을 보낼 때도 많았고.
그동안 지독하게 스웨덴 화가 된 것인지 내가 모르던 또 다른 대한민국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필요 없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다. 나는 기다릴 수 있고 가장 빠른 배송 옵션을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상대편에서 너무 애써준 것 같아서 감사하면서도 민망하고. 이런 속도에 익숙해지는 것이 한편 무서워서 경계심이 들 정도였다.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것은 라이프스타일에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당장 나만 봐도 우리나라에서 편리함의 수혜를 받으면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어른스럽게 기다리는 법을 알면서도 쓸데없이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데 에너지를 쓰고 나도 모르게 빠르게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한국 사회에서 잠시 벗어나기를 선택한 사람이지만, 개인적으로 적당한 밸런스를 찾는 일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매번 나도 모르게 한국과 스웨덴을 비교하면서 왜 내가 알던 대로 일이 굴러가지 않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답답해하고 만다. 그러나 나는 과연 언제 어떤 서비스가, 어떤 프로세스가 느리다고 비난할 수 있는 걸까? 혹시 나는 편리함과 다른 것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은 내가 급하면 급하고 예민한 얼굴을 하고, 시간이 넉넉하면 여유로운 좋은 사람의 얼굴을 하면서.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스웨덴의 시스템이 더 낫다고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두 나라가 서로 다른 속도로 컨테이너 벨트를 돌릴 때, 앞서 말했듯 천천히 굴러가는 컨테이너 벨트 안에서 참을 수 없이 불편한 일들이 분명히 일어났기 때문에.
여기도 언젠가는 치열한 서비스 속도전을 치를 것이다. 당장 내가 처음 왔을 때보다 확실히 거리에 돌아다니는 배달 자전거가 많아졌고 편리함을 돈을 주고 사는 서비스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성장할 것이다. 스웨덴은 배달비가 비싸서 절대 배달음식을 안 시킨다 그런 말은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배달비가 계속 올라도 꾸준히 배달음식을 시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여기 사람들도 필요하면 돈을 쓴다. 편리함을 돈을 주고 살 줄 안다.
하지만 아마 내가 여기 사는 동안에는 속도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지도. 허망하게 쓸모없어진 카드를 가위로 자르면서 생각한다. 카드 비밀번호를 절대 틀리지 말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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