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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피 Apr 04. 2022

아버지도 사실 도움이 필요했던건 아닐까

글쓰기 연습 005

어릴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종종 만물박사라고 부르곤 했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아버지께 여쭤보면 항상 답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가령 책을 읽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거나 뉴스를 보다가 모르는 내용이 나올 때 아버지께 여쭤보면 항상 답을 알려주셨다. 아버지가 알려주신 답이 정말 맞는 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질문에 항상 막힘없이 대답을 해주시는 모습에 그것이 답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며 아버지에 대한 만물박사론은 다소 희미해졌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는 답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이 많았고 대부분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 중 여전히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항상 내 질문에 흔쾌히 답을 주셨다.


그러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부족함을 느끼게 됐던 시점은 내가 스물 다섯살이 되었을 쯤이었다.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내 방 책상에 놓여진 아버지 노트북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PPT 발표자료를 발견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30년 가까이 다니신 직장을 그만두신 뒤 새로운 분야에 재취업을 준비중이셨는데, 그 중 어떤 곳에서 채용과제로 PPT 발표를 요구해 열심히 만들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내용이야 잘 몰랐지만 PPT 디자인 만큼은 학교를 다니며 자주 해왔기에 아버지의 PPT 발표자료를 보자마자 도움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글씨와 엉성한 레이아웃, 거기에 촌스러운 색상까지 누가봐도 50대 아저씨의 PPT 발표자료였다. 이에 나는 곧장 아버지께 PPT 발표자료의 디자인을 바꿔야할 것 같다고 강력히 말씀드렸고 아버지께서는 이내 내게 놀라운 말을 건네셨다.


"그래? 그럼 아들이 좀 도와줄래?"


이 말은 내게 꽤나 큰 충격을 줬다. 그 동안 살면서 한 번도 아버지의 부족함을 제대로 마주해보지 못했기에 스스로의 부족함을 가감없이 시인하는 아버지의 말은 그 자체로 놀라웠다. 더불어 매번 도움을 받는 것은 나였기에 내가 아버지께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곤 상상해본 적이 없어 뭐라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더불어 그것은 일과 관련된 것이었기에 내가 과연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진심으로 내 도움을 받고자 하셨고, 나는 약간의 부담과 함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와드렸다. 당시 정확히 어떻게 PPT를 바꿔드렸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최대한 멋있게 하지만 유치하지 않게 꽤나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PPT를 수정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내가 수정해드린 PPT 발표자료를 정말 활용하셨는지 여쭤보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다행히 재취업에 성공하실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이후로도 약 6년을 더 일하시다 60대 중반의 나이로 올해 완전히 은퇴하셨다. 그리고 어느덧 나도 서른을 넘어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셨을 때의 나이가 됐다. 이제는 아버지가 더이상 만물박사도 완전한 존재도 아니란 것을 안다. 사실 처음부터 아니었지만 그동안 악착같이 버텨온 것도 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절실히 도움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어려운 법이니까.


이제는 나도 누나도 나름 어른이 되었으니 부담 내려놓고 마음 편히 도움을 받으셨으면 좋겠다. 충분히 고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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