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한 첫사랑의 그림자

시가 내 시간을 흔들었다 11/기형도-빈 집

by 초린혜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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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생각하면 항상 기형도 시인이 생각났어. 그중에서도 특히 이 '빈집'의 첫 구절이 입 끝에 맴돌지."


이 한마디에 와인잔을 쥐고 있던 제 손에는 감출 수 없는 떨림이 일었습니다. 그럼요, 그는 내 첫사랑이었으니까요. 가없이 서성대던 마음도, 풀꽃처럼 방싯거리기만 한 그리움도 사랑이었을까, 자주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지만 7월의 물오른 복숭아 향이 은은하게 배어나는 이야기들이 그와 나 사이엔 있으니,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 사랑일까 되묻곤 합니다.


'설렘'이란 느낌을 그를 보는 순간마다 각성했으니까요, 다음 만날 날을 기다리며 가끔은 잠 못 이루기도 했으니까요. 땀이 축축하게 배어난 손으로 깍지를 끼거나, 서툰 입맞춤을 한 건 아니지만 한번도 겪지 못했던 낯선 설렘, 그 하나만으로도 사랑의 충분조건을 갖춘 우리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일생에 오직 한 차례 귀하게 찾아오는 첫사랑인 줄도 모르고 시간과 계절을 여러 차례 앓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확인하게 된 첫사랑이었습니다. 세월이 야속타, 탓만 하기엔 너무 무정하게 흐른 시간들 속에서 그의 뒤늦은 고백 끝에 녹아내리는 고드름처럼 딸려온 시. '빈집'은 어쩌면 내 인생 최고의 시임과 동시에 가장 아픈 시라는 양가감정이 내포될 수밖에 없겠군요.


아무리 애써도 지울 수 없기에 더욱 아릿한, 너무 또렷한, 제 첫사랑의 그림자를 불러오지 않더라도 사랑 후에 오는 비릿하고 먹먹한 순간을 이토록 짧은 한 행으로 대변해주는 시가 있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시간들, 곁에 머물던 풍경과 시선을 잡아두던 사소한 물건과 감정에조차 이별을 고해야 했던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가늠하기 힘든 회색의 무너짐이었으리라 혼자 생각해봤습니다. 무지갯빛으로 벅차오르던 환영이 덧칠된 회색으로 바뀌는 순간, 아~~! 모든 만남에는 정해진 이별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꼭 이 빈집에 묘사된 사랑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빈집의 텅 빈 공허, 몰가치성, 존재의 부정, 기형도 시인의 사랑이 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마무리되었을지에 대해선 끝까지 물음표로 남겨두려 합니다.


우리 사랑의 상실이 어느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잃은 것이 아닌,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아야 할 경계선을 견고히 쳐두고 스스로를 가둔 데서 기인하기에, 나의 지난 사랑도 빈집에 갇힌 적막하고 가여운 시인의 사랑과 다를 바 없다 싶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무척 다행이다 생각합니다. 첫사랑에 대한 복잡다단한 감정의 결을 이 귀한 몇 줄 시로 요약할 수 있어서 말이죠.


뒤늦은 고백과 함께 극도로 말을 아껴가며 눈빛만 주고받던 먹먹함 속에서도 네 맘이 곧 내 맘이라며 마음을 담은 헛헛한 웃음, 웃을 수 있었기에 이 시 '빈집'은 몸속 더 깊숙이 새겨지더군요. 하여,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으므로 '불멸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첫사랑'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누군가 너의 첫사랑은 어떠했냐는 우문을 물어올 때면 눈에 물기를 머금고 기형도 시인의 '빈집'을 소중하게, 지그시 현답으로 꺼내놓을 겁니다.


어쩌면 전,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떠올릴 때마다 미소가 번지고, 그이의 삶이 공허하지 않기를 기도하게 되는 첫사랑의 기록이, 이토록 진한 시 한 줄 덕분에 지워지지 않았기에 오래도록 추억할 수 있으니까요. 여전히 그가, 외로움에 젖어들 때면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으며, 포크락이나 록 음악으로 공간을 채워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시를 사랑했고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건네준 음악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던 열여덟의 나를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현실의 주름진 커튼을 열어젖히고 어둡게 내려앉은 삶의 공기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싶을 때면, 자주 이 시의 첫 행을 떠올릴 겁니다. 모든 사랑에 확실하고도 선명한 유효기간이 새겨진다 할지라도 단 하나 처음의 그 사랑, 절대적 순수의 이름에는 끝을 고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커버 이미지/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