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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Sep 23. 2020

내일을 살게 할 최고의 비타민

편지, 딸에게

엄마에겐 요즘 매일 아침 챙겨 먹게 되는 약이 하나씩 늘고 있어.


전 국민 누구나 다~ 먹는다는 비타민 c는 기본이고너무 빨리 늙어버린 잇몸을 개선해 준다는 약이며 갱년기 증상을 완화시켜준다는 약에,동네 단골 카페 주인장이 함께 건강하자며 선물해준 ‘오메가 3’까지.


 아! 그렇지 오늘은 저녁 운동을 하기 전에

활력 증진을 위해 홍삼진액도 잊지 않고 마셨단다.

이 약들을 몽땅 모아서 네가 볼 수 있게 사진이라도 찍어 보낸다면 아마 너는 몸서리를 치겠지?


엄마가 좀 더 젊었을 때, 선배들을 만나기만 하면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농담을 하곤 했었는데,

그때만 해도 "선배님들 무슨 그런 농담을 하느냐" 큰 소리로 웃고 간간이 놀리기까지 했단다.


그런데 엄마에게도 이렇게 자의적으로 건강을 챙기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스스로 상상하지도, 아니지, 하고 싶지도 않은 장면이었단다.


그런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조금씩 몸의 기관들이 고장이 났다 신호를 보내오고,

그 자잘한 고장을 고치는데 예전보다는 더~시간이 걸리게 되면서 엄마도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내 몸과 정신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됐단다.


어쩌면 나이 들어서 그나마 좋은 건, 이렇게 육체도 정신도 객관화시키는 이성이 발달을 하게 된다는 걸 거야. 잃어가는 것도, 쇠락해가는 것도 너무나 많아지지만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을

세상살이에 적용해가며 조금 더 순해지게 되거든


너도 알다시피 까칠하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엄마잖아. 무엇이든 불합리한 것들을 보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만

직성이 풀리고, 함부로 목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지만, 한 번 잘못됐다 싶은 것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낮은 목소리로 내 주장을 관철시키고야 마는 그런 엄마였잖아.


그런데 말이야. 이제 ‘동네 아줌마들’ 무리에서 별로 튀지 않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틈틈이 유치한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사는 모습.

예전 같으면 상상이나 했겠니?


아! 물론 이런 모습들이 아침마다 비타민을 포함한 여러 약들을 챙겨 먹음으로 기게 된 건 아니지만 일정 부분은 인정해야 하는 게, 비타민을 빼먹지 않고 챙겨 먹어야 하는 시간을 스스로 수긍하게 되면서 이렇게 세월을 안는 힘이 조금 더 커진 셈이긴 하지.



아무튼, 여전히 비타민 챙겨 먹으라는 소릴 잔소리쯤으로 여기고 요리조리 딴청을 피우는 너이지만, 엄마도 어렴풋이 알고 있단다.

네가 왜 "아직 비타민 같은 거 안 먹어도 돼"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지를 말이야.


우선은 비타민을 일일이 챙겨 먹을 여유없이 치열한 하루하루, 순간을 달려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비타민을 대신할 고유한 무형의 특성

(예를 들면 활화산 같은 추진력?)이 너에겐 여전히 충분해서 그렇겠지.


엄마는 그것이 치기로만 그치지 않고 더 발전해 나갈 것을 항상 믿고 있단다.너를 포함한 청춘들에겐 이토록 고단한 눈물의 시간들조차도

내일을 다시 살게 할 정제된 비타민으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바라건대 엄마는 우리 딸이 비타민을 챙겨 먹는 날이 아주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조금 더 느린 걸음으로 와 주길 희망한단다.

다른 어떤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너의 몸 구석구석 내재된 근력과 지치지 않는 정신력이,

필요할 때마다 '화수분'처럼 샘솟아, 네 삶을 더 윤이 나도록 만들어줬으면 싶다.


그리고, 무조건 합리적으로 살지 않아도,

까칠한 모습으로 따져 묻기를 즐겨해도 좋으니,

너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오래도록 살았으면 해! 그런 기적에 가까운 일이 염원만으로도 가능해진다면, 엄마는 남은 삶을  염원을 이루는 기도로 오롯이 채워나갈 수도 있어.


물론 그 기도를 계속하자면 엄마에겐 '딸'이라는 인간 비타민의 도움도 아주 가끔은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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