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항상, 다양성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일까?
편지, 딸에게
너의 어릴 적 별명은 ‘호기심 천국’이었지. 기억나니? 혹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성을 따, ‘하고지비 류’라고도 불리었고. 처음 만나는 것들(사물이나 상황 모두를 포함)만 보면 눈이 어찌나 반짝이던지.. 이런 표현이 어떨지는 모르겠다만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그런 너의 눈을 두고 ‘작고 귀여운 쥐의 눈’ 같다고도 말씀하셨지.
쥐란 동물이 어느 틈엔가 기피할 대상이 돼 그렇지, 가만히 보면 까만 눈동자만큼은 늘~샛별처럼 반짝이고 있으니까. 아무튼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항상 1등이었던 너의 그런 성정을 보면서 ‘저런 호기심은 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너를 키우는 내내 많이도 궁금했었단다.
사실 고백하건대 엄마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덴 영~젬병이었거든! 항상 가슴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무거운 돌처럼 자리하고 있었고.. 그 돌을 피한다거나 아예 없는 것처럼 좌시하는 건, 엄마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단다. 이따금 이런 내가 너무도 싫어서 반발로라도 어쭙잖은 시도들을 해보곤 한다만, 역시 진정성이 결여된 그 시도들은 번번이 실패로 마무리될 때가 더~ 많더구나.
이런 학습된 실패가 어쩌면 다시금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너의 무한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확장시켜가는 성장 사를 지켜보면서 엄마는 마침내 깨달았단다. ‘아! 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완벽해야 한다는 망상 때문에 익숙한 것에 젖어 사는구나!‘ 하고 말이야.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의 익숙함에 젖어 사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심심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자각을 너무 늦게 한 거지. 그마저도 ‘너’ 란 훌륭한 자극을 만났기에 가능했던 거고. 아무튼 너의 ‘호기심’ 이 빛났던 순간마다, 네 생의 결은 조금씩 단단해지고 아름다운 성숙의 색깔들로 입혀졌을 것이야.
비겁한 변명 같겠지만 너를 지켜보면서 엄마는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단다. 다양성을 시도하지 않아서 얻은 ‘편협하지만 그런대로 프로페셔널’의 이름표를 달고 살아가는 엄마에게 가끔은 너의 빛나는 호기심을 즐거이 이식해주길 바라며, ‘네가 엄마 딸이어서 참 다행이다.’로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