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그 여름의 끝
백일홍이란 이름을 가진 꽃은 두 종류다
낮은 키에 꽃잎이 많은 국화과의 꽃 백일홍과
바로 이 시에 등장하는 나무 백일홍이다.
꽃 백일홍에게는 안타깝고 미안한 일이지만
이 시가 등장한 이후로 , 내 꽃 사전엔 오로지
목백일홍만이 남아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 초입까지그 선홍의 빛깔을 떨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이성복이라는 뛰어난 '시 장르'를 앙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성복 시인의 시는 잘 읽히지 않는다.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반복해서
집중을 하고 읽어도 시인의 의중이 쉬 와 닿지가
않아서, 시 한 편을 읽는데도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잘 읽히지 않음이 무슨 연유에서 비롯됐나 싶었는데,시인의 사유로 깊어지고 선명해진 詩語들이문장 여기저기 매복하고 있다가, 읽는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치 돌부리에 걸린 듯.
'그 여름의 끝'을 처음 읽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생의 가장 지리멸렬한 시기를 시인이 경험한 폭풍만큼큰 혼돈으로 지나가고 있었고, 어리석게도 시구절에서구원을 얻고자 했다.
니체가 가장 절망적일 때 그려 낸 차라투스트라 같은 위버멘쉬를 만날 심산으로 말이다.
나의 무지한 계획은 ,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라는첫 구절, 이 흔치 않은 두괄식 전개로부터 어그러져 버렸고,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에서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시각의 불일치가 밀려왔다.
이렇게 짧은 시인데, 이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읽어야 하다니! 불친절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시인의 말.첫 대면에서 느꼈던 불쾌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이 시를 찬양하는 이들이 일견 수상쩍기까지 했다.
그, 러, 나.. 몇 년 전 여름의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는 선운사 목백일홍을 목도한 순간, 계시를 받아 든 선지자처럼 나는 그야말로 온전하게 이 시와 이성복 시인의 목백일홍을, 그리고 피의 절망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까이서 본 선운사의 목백일홍은 수백 번의 뜨거운 여름과여름 속에 깃든 절망을 이겨내고, 그 핏빛의 잔해들을선연하고도 아름답게 떨어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더더욱 아프고 슬픈, 다면적 심상!삶이 곧 죽음으로, 그리고 그 죽음이 다시 생명을 호명하고 있는 광경. 거기에는 그저 경외만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느낀 이 감정이 시인이 그리고자 한
바로 그 감정이 아니어도 괜찮다.시는 읽는 이의 마음결을 따라 수만수천의 갈래로나뉠 수도 있음이다.
다만 오늘, 목백일홍이 떨어진 자리,붉게 타오르는 불 같기도 하고 피눈물의 강 같기도 한 이 자리에 서서, 절망이 드디어 끝났음을 장난처럼 선언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