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사이 아침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이불을 턱까지 바짝 당기게 만들었다. 가을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상강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닥친 이른 추위에 보일러를 켜고 하루를 시작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신문의 기사 한 줄이 유독 눈에 띈다. 국민 연료로 사랑받던 연탄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라는 것이다. 오.. 100년이라니! 하지만 이 감탄이 이내 장탄식으로 바뀌는 데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도 100세 시대 운운하며 100년 그 이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즈음, 왠지 연탄이 살아온 지난 100년의 수명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소박하지만, 한편 절실한 물음이 생겨나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날이 발전하는 보일러 기술을 접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지구환경을 보존할 수 있다는 보일러로 교체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지금도 연탄으로만 겨울을 나야 하는 에너지 빈곤층인 이웃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최근 6년 사이 폐업한 연탄공장만도 10곳 거기다 경기 악화와 장기간 이어진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올해는 맘 따뜻한 사람들이 이어오던 '연탄 나눔' 도 어쩌면 많이 줄어들지 않겠냐는 안타까운 전언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 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연탄 한 장-
연탄 이야기만 나오면 아주 자연스레, '연탄 시인'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을 안도현 시인의 시 두 편을 이렇게 떠올리게 된다. 시인의 다른 시들도 너무 좋지만 교과서에까지 실림으로 거의 전 국민이 알게 된 이들 시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크지 않을까? 어느 틈에 국민시가 된 지 오래기도 하고.
애초에 이토록 파급력이 큰 시가 될 것인지 시인이 예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란 모름지기 시적 화자의 진심이 담겨 있어야만 시로서의 삶, 그 아름다운 연대기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제대로 보여준 시가 아닐까 한다.
시인의 말대로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이 어느새 다가오니 너도나도 지나 온 삶을 또 반추하게 되는데,
내 경우'너에게 묻는다'와 '연탄 한 장'을 읽을 때면 광에 연탄을 100장 들여놓던 날, 세상을 다 가진 듯좋아하시던 엄마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다른 집들은 월동준비로 1000장, 500장씩 들여놓을 때 100장만 있어도 우린 부자라며 아이처럼 웃으시곤 했는데.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김 씨 아저씨의 아궁이 불이 꺼질까 봐 그 아끼던 100장의 연탄 중 몇 장을 언제나 선뜻 내어주고 , 연탄불에 뭉근히 끓여낸 동태탕 한 그릇 , 밥 굶고 다니지 말라며 문틈으로 들이밀던 내 어머니! -당신은 참 숱하게 연탄만큼 뜨거운 사람으로 살다 가셨군요.-
'너에게 묻는다'는 단 3행으로 이뤄져 있으면서 어쩌면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느냐, 냉엄한 죽비를 후려쳐주는 가장 완벽한 시 한 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항상 세트처럼 따라다니는 시 '연탄 한 장'을 연이어 읽고 있노라면 누군가의 추위와 아픔을 데우는 사람을 넘어, 때로는 한 몸 부숴가면서까지 기꺼이 몸 전체를 내어줄 수 있는 연탄의 생을 닮은 사람이어야만 진정 사람답다는 결론에도 어렵지 않게 이르게 된다.
이것이 몇몇 고매한 순교자에게만 해당하는 그래서 우리 같은 '필부필부' 들이 행하기에는 진정 불가능한 일일까? 아니다. 얼마 전 울산 화재 현장을 스케치한 기사를 보니 거기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탄 한 장' 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얇은 잠옷 차림에 맨발로 피신한 임산부에게 코트와 신발을 기꺼이 내어준 어느 여성, 가족의 안위보다 이웃을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아빠와 아들, 탈출하면서 부모를 놓쳐버린 이웃 아이들의 손을 필사적으로 잡아준 부부.. 한 층을 소방관들의 휴식 공간으로 내어준 '자동차 매장' , 자비로 음식과 음료를 챙겨 온 시민들.
다 열거할 수도 없는 '연탄 한 장' 들은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뜨거운 사람으로, 묵묵히 각자의 몫을 다했던 것이다.
본인 기준으론넉넉지가 않아서, 시간이 없어서, 나눔이라는 건 등도 따시고 배도 부른,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어서.. 정말 핑계도 많고 많지만, 핑곗거리가 떠오를 때면 뜨겁게 타오르다 마지막 남은 재까지 내어주며, 얼음길조차 걸어갈 수 있는 길로 만들어 주는 연탄의 삶을 생각해보자.
나 아닌 누구를 위하는 일에는 고민과 순서가 우선적으로 매겨지면 안 되는 것이다. 아직은 누군가가 건네 줄연탄만을 기다리는 이들도 많은 데, 연탄 한 장의 소비자 가격이 800원이 넘는다는데...... 가을과 함께 이런 현실적인 고민도 함께 깊어진다.
하지만 시인의 호통이 다시 우리의 잠든 뜨거움을 깨우고 삶을 확장시켜, 추운 날 누군가를 위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단한 연탄 한 장의 모습으로 기꺼이 살아갈 수 있게끔 그렇게 인도하기를, 염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