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이야기 한 조각의 인문학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ㅡ 끝없는 혼란을 이기는 다정함의 힘

by 꼬야책방

다정함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평범한 영웅의 탄생

에블린은 우리가 흔히 거리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하루, 밀린 세무 서류들, 딸과의 서먹한 대화, 그리고 끝없는 걱정들. 그녀의 일상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어쩌면 조금 힘겨운 중년 여성의 평범한 삶이었다.

하지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바로 이런 평범함 속에서 진짜 영웅을 발견해낸다. 수많은 우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작은 빨래방을 운영하는 에블린이라는 설정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선택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때마다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에블린이 무수한 평행우주를 넘나들며 만나는 다양한 자신의 모습들은 바로 이런 우리의 마음을 대변한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유명한 영화배우가 된 자신, 요리사가 된 자신, 심지어 핫도그 손가락을 가진 기이한 우주의 자신까지 만난다. 각각의 우주에서 그녀는 서로 다른 선택을 했고,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장면들을 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과연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일까?"

하지만 영화는 점차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 완벽해 보이는 다른 우주의 삶들도 각자의 공허함과 아픔을 안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했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라는 것을 말이다.



허무주의라는 거대한 적

영화의 진짜 악역은 거대한 괴물도 우주 정복자도 아니다. 바로 허무주의다. 에블린의 딸 조이가 변한 '조부 투패키'는 모든 우주를 경험하고 나서 느낀 절대적 허무함의 화신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본 그녀는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차피 모든 선택이 다 존재하고, 모든 결과가 다 일어난다면,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지 않을까?

이는 현대인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SNS를 통해 남들의 화려한 삶을 보며 자신의 평범함을 한탄하거나,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오히려 선택 장애에 빠지는 것. 무한한 정보와 가능성 앞에서 우리는 때로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느껴지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다정함이라는 무기

그런데 에블린은 어떻게 이 거대한 허무주의를 이겨낼 수 있었을까?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바로 '다정함'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에블린이 모든 우주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푸는 모습이다. 세무 조사관에게는 따뜻한 관심을, 경비원에게는 진심 어린 감사를,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파괴하려는 딸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이 다정함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우주적 위기 앞에서 작은 친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거창한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바로 이런 작고 일상적인 다정함의 누적이라는 것을.




패턴이 만드는 힘

김혼비 작가는 『다정소감』에서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의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고 했다. 이 말이 영화 속 에블린의 변화를 정확히 설명해준다.

에블린이 우주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갑자기 슈퍼히어로가 되어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반복해온 다정함의 패턴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것이었다. 딸을 위해 포기했던 꿈들, 남편을 위해 참아온 불편함들, 아버지를 이해하려 애썼던 노력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의 악력'을 키워왔던 것이다.




평범함 속의 비범함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이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재능도, 화려한 경력도,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는 일상이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에블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매순간 선택을 한다. 화를 낼 것인가, 참을 것인가. 무관심할 것인가, 관심을 가질 것인가. 차갑게 대할 것인가, 따뜻하게 대할 것인가. 이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우리의 삶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이 다정함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정함의 전염력

다정함의 놀라운 점은 그것의 전염력이다. 에블린이 세무 조사관에게 보인 작은 친절이 그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한 사람의 다정함이 점점 넓은 범위로 퍼져나간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한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힘든 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해주고, 그 덕분에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게 된다. 작은 다정함이 큰 다정함을 낳고, 그것이 또 다른 다정함을 만들어낸다.



허무주의에 맞서는 방법

현대 사회는 우리를 허무주의로 이끄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끝없는 경쟁, 비교당하는 삶, 불확실한 미래.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이런 허무주의를 이겨낼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거창한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다정함을 베푸는 것이다.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가 바로 다정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일상의 영웅들

우리 주변에는 에블린 같은 사람들이 많다. 묵묵히 가족을 돌보는 부모,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진,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공무원들. 이들의 일상은 화려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다정함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

영화 속 에블린처럼, 이들도 자신이 세상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작은 선택들, 다정한 행동들이 모여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마음의 악력을 기르는 법

김혼비 작가가 말한 '마음의 악력'을 기르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매일 조금씩, 의식적으로 다정함을 연습하는 것이다.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 동료의 수고에 감사 인사하기, 길에서 마주친 낯선 이에게 미소 짓기. 이런 작은 행동들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다정함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반응이 된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려울 수 있다. 특히 상처받은 경험이 있거나,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근육을 기르는 것처럼, 꾸준히 연습하면 마음의 악력도 강해진다. 그리고 그 힘으로 우리는 인생의 어려운 순간들을 견뎌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슈퍼히어로의 몫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의 몫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방법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작은 다정함이라는 것.

에블린이 딸을 품에 안고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우주가 구원받는다. 이는 사랑과 다정함이 가진 궁극적 힘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아무리 허무해 보일지라도, 다정함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정함이다. 나 자신에 대한 다정함, 가족에 대한 다정함, 이웃에 대한 다정함,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다정함.

그 다정함이 모여서 세상을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간다. 에블린처럼, 우리 모두는 우주를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영웅들이다. 단지 그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image.png?type=w1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해군 아들, 엄마의 마음